H와 나는 동료들과 처음 갖는 술자리에서 새벽 내내 달리고 최후의 2인이 됐을 뿐만 아니라, 그걸로도 모자라서 남은 술을 들고 근처에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을 기어코 찾아 내선 남은 술을 함께 마셨다. 그러고서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꽤나 멀리 사는 H를 여섯 평 남짓 원룸으로 초대했고, 그녀는 응당 허락했다. 집 근처 맛집이라는 막창집에서 우리는 두 번째 만남을 가졌고 소주의 힘을 빌려 서로의 모든 치부를 꺼냈다. 그리고 우리는 더더욱 확신했다. 우리는 동족이 맞구나.
그런 H와 부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맛있는 부산 음식에 맛있는 술을 마시는 것이 최대 목적인 여행! 말 그대로 식도락을 빙자한 술도락 여행이었다. 부산 술도락 대서사시는 곱도리탕과 소맥으로 성대하게 막을 올렸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채로 관광객스럽게 보수동 책방골목과 국제시장을 구경하기도 했다. 관광으로 술을 깬 뒤에는 진정한 목적지였던 족발골목으로 향했다. 부산하면 냉채족발! 냉채족발에는 소주! 역시나 나와 짝짜꿍이 잘 맞는 H. 동족과 함께하는 여행은 너무나 즐거웠기에 첫 날을 이대로 끝내긴 아쉬웠다. 우리는 저녁 식사 및 음주를 즐기고 한껏 신이 난 채로 2차까지 가기로 결정했다. 2차는 물회. 물회라니, 소주를 아니 마실 수 없는 메뉴 아닌가! 배가 꺼질 새도, 술이 깰 새도 없이 물회에 소주를 들이켰다. 부산은 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많은 걸까, 우리는 맛있는 음식에 술 참는 방법 모르는데…. 그러고도 부족했는지 우리는 숙소에 돌아가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 술을 더 사서 들어가기까지 했다. 다음 날의 우리가 얼마나 숙취에 시달릴지는 단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아주 남 일이라는 듯이, 아직 여행 1일 차였는데, 앞으로 남은 여행일의 컨디션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서, 우리는 오늘이 술을 마실 수 있는 마지막 날인 것처럼 술을 마셨다. 둘 중 아무도 서로를 말릴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우리가 동족임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 점이었다.
다음 날, 그렇게 술을 마시고, 마시고, 또 마셨으니 숙취가 없을 리 없었다. 그날의 숙취는 내 음주인생 중 손꼽을 만큼 힘든 숙취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큰맘 먹고 여행을 온 것이었고, 심지어 3박 4일 중 둘째 날이었으므로 가장 가열차게 여행을 해야 하는 날이기도 했다. 우리는 ‘아이고 죽겠다’하면서도 호텔방에 누워만 있을 수는 없어서 끝내주는 해장을 하고 정신을 차린 뒤 여행 이틀차 일정을 소화하기로 결정했다.
끝내주는 해장 메뉴는 복국으로 정했다. 여기서 동족인 H와 나의 한 가지 다른 면이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해장술 가능 여부였다. 내 오랜 음주 세월 동안 해장술은 절대 금기의 영역이었다. 특히나 이렇게 숙취가 심한 날에는 소주병을 생각하기만 해도 구역질이 올라오는 정도라 해장술은 절대 고사하고 ‘진짜 정말 무조건 술 끊는다’라는 생각만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H는 알아주는 해장술 고수였다. H는 ‘해장술은 처음 딱 세 잔만 마실 수 있으면, 한 병도 마실 수 있다.’라는 명언을 남길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복국이라, 해장국으로도 최고지만 술안주로도 최고인 메뉴 아닌가. 나는 복국으로 기적처럼 숙취가 말끔하게 사라지길, H는 해장술 한잔으로 말짱한 상태가 되길 바라며 복국집을 향해 걸었다.
우리는 걸어 다니는 소주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는 상태로 술냄새를 풍기며 복국집에 도착했다. 꽤 유명한 식당인지 손님들이 가득 차있었고, 각기 다른 테이블이지만 모두 합심이라도 한 듯 테이블마다 소주병이 한 두 병씩 올라와있었다. 나는 그 소주병을 보고 헛구역질을 한 반면, H는 해장술 하기에 제격인 식당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해장술을 하기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이른 시간부터 술을 마신다는 타인의 눈총인데, 모두가 이른 시간부터 술을 마시고 있으니 다른 사람의 눈총을 받을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복국은 아주 시원하고 맛있었지만 나는 끔찍한 숙취에 두 손과 두 발을 다 들고 골골거렸다. 위장이 음식을 결단코 거부했다. 술병이 너무나 지독해서 다신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것도 아주 영원히.
그러나 H는 우리가 언제 동족이었냐는듯 나와는 다른 길을 갔다. H는 기어코 소주 한 병을 시켜 자신의 명언대로 소주 몇 잔을 꿀떡 넘기더니 소주병을 비우기에 이르렀다. 나는 H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봤다. H는 언제 숙취를 겪었냐는 듯, 해장술의 기운으로 숙취를 마비시키고는 기세등등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나도 해장술을 마시면 멀쩡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 옆 테이블에 앉은 술톤 피부색의 아저씨 한 분이 종이컵에 소주를 콸콸 따라서 벌컥벌컥 마시는데 그걸 보다 보니 술병에 걸려 죽어버렸던 애주가의 피가 잠시 끓는 듯도 했다. 해장술, 한번 도전해 봐?
혹시나 하는 도전 정신으로 소주를 한잔 따랐다. 이거 마시면 우리 사귀는 거다, 가 아니고 이거 마시면 숙취 없어지는 거다? 내 장기와 묵언의 약속을 하고 한잔 마셔보려 했는데… 알코올 향이 코에 닿자마자 경기하듯 구역질이 올라왔다. 도저히 절대 입에 대기도 싫은 향이었다. 도대체 그동안 그 많은 술을 어떻게 마셨는지 모를 일이었다. 소독약 냄새가 나는 쓴 물을, 단지 술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셔왔다니. 그 순간에는 살면서 이렇게까지 술이 싫은 적이 있었나? 싶었을 정도로 술이 진절머리 나게 싫었다. 술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해놓고 혹시나 하면서 또 술을 마시려 하다니. 술도 싫고, 술을 마시려던 나도 싫었다. 왜 나는 술 앞에서 이렇게 단순 무식해지는 걸까.
원래는 술을 좋아했었는데 한번 숙취로 크게 고생하고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는 사람들을 종종 봐왔지만, 내가 그 사람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엔 정말 가능할 것 같았다. 해장술, 너 정말 무시무시하구나. 알코올 사랑단을 이렇게 단번에 알코올 혐오단으로 바꿀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을 거야.
이렇게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해장술 도전 경험은 나에게 크나큰 괴로움과 충격을 선사했다. 숙취와 술병을 백날 겪으면서도 ‘술은 죄 없다, 많이 먹은 내가 죄인이다.’ 했던 내가 술을 그렇게 객관적으로 악평해 보긴 처음이었다. 이후로 해장술은 절대 눈으로도, 코로도, 입으로도, 생각으로도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금주를 다짐할 때마다 해장술에서 느꼈던 불쾌감을 떠올린다. 아침의 술과 저녁의 술은 사실 서로 다르지 않음을. 내가 나의 동지 H와 저녁에 즐겁게 먹었던 술도, 해장으로 먹어보려던 힘겨운 술도 단지 감미료를 넣은 쓰디쓴 알코올에 불과함을. 결국 해장술을 거부하는 마음이라면 모든 술을 거부해야 함을. 즐거운 음주만은 변호하고 싶기에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들을 결국 시인하며 금주의 편에 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