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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우리들의 술 없이도 행복한 시간

by 성새진


기후위기로 인한 이상기온이 체감되는 나날이었다.


11월이 되었는데도 반소매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왕왕 눈에 띌 정도였다. 올해는 유난히 여름이 길었다. 덥다 덥다 해도 올해같이 진절머리 날 정도로 더운 해는 처음이었다. 입추가 지나면 좀 시원해지려나? 처서가 지나면 좀 시원해지려나? 아니면 입동? 세지도 않는 음력과 날짜도 모르는 절기를 백날 확인하고 일기예보를 여러 번 보아도 30도에 육박하는 더위는 매일같이 이어졌다. 나는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가을, 아니 이제 겨울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11월 말이 되고 드디어 쌀랑한 찬바람이 불자 마음이 산뜻해지기 그지없었다. 얼마 만에 마주한 찬바람인지! 콧구멍 가득 들어차는 차가운 공기를 음미했다.


이제 곧 겨울이다!


애주가가 겨울을 기다리는 이유는 별 것 없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다는 것은 방어에는 기름이 오르고, 굴은 크고 통통하게 살이 오르는 대 해산물 시즌이 도래하고 있다는 뜻으로 봐도 무방했다. 해산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술 안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해산물과 술을 둘 다 좋아하는 사람 중에 겨울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는 찬 바람이 불자마자 제일 먼저 방어를 먹으러 가기 위한 약속을 잡았다. 방어는 나의 애인 J와 특별한 인연을 만들어준 음식이기도 해서 올해의 첫 방어를 J와 함께 먹으려 했던 것이다. 방어를 먹기로 한 날은 토요일. 그전 주부터 방어, 방어, 노래를 부르며 방어를 먹기로 약속한 전날이 됐다. 그런데 아뿔싸! 전 날 술자리에서 내 생각보다 많은 술을 마셔버렸다. 오랜만에 즐기는 걸스 나잇에서 너무나 즐거웠던 나는 과실주, 하이볼, 샴페인, 화이트 와인까지 쉬지 않고 마셨고, 정작 그렇게 고대하던 방어를 먹기로 한 토요일에도 컨디션이 백 퍼센트 돌아오지 않아 버렸다. (이 글이 <아무튼, 음주>가 아닌 <아무튼, 금주>가 맞는 것인지 혼란스럽겠지만 이해해 주길 바란다.)


아무튼 그렇게 먹고 싶은 방어였지만, 아니 그만큼 먹고 싶었던 방어였기에 이런 완벽하지 않은 누추한 컨디션으로 귀한 안주를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J와의 충분한 협의 끝에 방어는 좋은 컨디션일 때 맛있게 먹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아주 갑작스럽고도 오랜만에 논알코올 토요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J는 나와 달리 술을 맛으로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나처럼 모든 음식에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도 아니다. 실제로 나를 만나기 전에는 술을 마시는 날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J는 애주가인 나를 만나 거의 모든 데이트를 술로 마무리하는 상황에 놓였다. 나야 술을 마시고, 취하는 게 일상이었으니 J와 그 일상을 함께하면 더 안전해지고 편안해졌지만, J는 나를 만나고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기 위해 아마 많은 것을 포기했을 것이다. 나의 술주정을 받아주는 정도는 시작에 불과했다. J는 외지에서 술 마시고 취한 나를 데리러 오기 위해 밤잠을 줄여야 했고, 술이 땡기지 않을 때도 내 잔에 ‘짠’을 해주기 위해 술을 마셔야 했다. 또 해외여행을 가서도 다른 기념품보다 면세 한도를 꽉 채울 만큼의 술을 기념품으로 챙겨 와야 했다. 이 밖에도 수많은 에피소드가 있었겠지만 J는 그것들을 기꺼이 감내하며 내 취미이자 특기인, 그리고 일상인 술을 묵묵히 함께해주고 있었다.


그런 J를 위해서라도, 갑작스럽게 찾아온 논알코올 데이는 술과 술기운으로 미뤄져야만 했던 맨 정신의 재미들을 함께하는 날이어야 했다.


논알코올 데이트의 첫 코스는 가벼운 저녁식사였다. 웨이팅 없이는 못 사는 유명한 베이글집에서 베이글을 종류별로 대여섯 가지 사고, 다른 빵집도 들러 J의 인생빵(트러플 포카치아)을 포함해 여러 개의 빵을 샀다. 토요일 저녁 메뉴가 커피와 베이글이라니! 술 없는 주말 저녁이 얼마나 오랜만인지, 과하고 거하지 않은 메뉴로도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걸 아주 새삼스럽게 이해했다. 집에 돌아와 커피를 내리고 상을 펴고 앉아 여기가 그 빵집인 양 빵을 죽 늘어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유명한 베이글을 한 조각씩 잘라 나눠 먹으며 어떤 베이글이 가장 맛있는지 품평했다. 가장 맛있는 베이글을 함께 고르며 서로의 취향을 다시금 탐색했다. 원래 같았으면 방어를 먹으며 소주를 거나하게 마셨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맨 정신의 우리는, 취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사과하거나,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하고도 잊었을지 모르는 무의미한 대화가 없었다.


술병이 나뒹굴지 않는 간소한 상을 정리하고, 영화를 예매하고서 잠깐 남는 시간에 온라인 게임을 했다. 조그마한 노트북에 둘이 붙어 앉아 함께 깔깔거리며 물풍선으로 몬스터를 잡았다. 우리는 술 냄새나 고기 냄새가 나지 않는, 왁자지껄과 어울리지 않는 오롯한 둘의 공간에서 누구도 일방적으로 술주정을 받아줄 필요 없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임이 조금 지겨워지자 드라이브도 할 겸 예매해 둔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 서늘한 밤공기 때문인지 차도 사람도 없는 넓은 길을 달리며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 기분. 나는 술에 취해 잠들기 바쁘고, J는 그런 나를 챙기기에 바빴던 여느 밤들의 드라이브와는 달랐다. 3시간에 가까운 영화를 보고 나와 영화 얘기로 조잘대는 산책길, 아기자기한 소품샵에 들러 자그마한 흔적을 남기는 소중한 순간, 아무런 준비 없이 찍은 사진 속의 풀리지 않은 눈. 말끔한 시야로 남긴 모든 순간들이 알코올과 함께 휘발될 일 없이 기억에 아로새겨졌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무난하고 평범한 데이트가 있을까 싶다. 밥 먹고, 게임하고, 영화 보고, 산책하고…. 그동안 술이라는 일시적 즐거움에 밀려 놓쳤던 평범한 일상의 행복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술 없이도 이렇게 즐거울 수 있구나. 아니, 술을 안 마셔서 이렇게 즐거움이 또렷할 수 있는 거구나.


한강 작가님이 노벨문학상을 타고서 “아들과 차를 마시며 조용히 축하하겠다”라고 말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차를 마시며……. 나는 어쩐지 자꾸만 그 헤드라인이 마음에 어룽거렸다. 그리고 이제는 인정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만취의 축배가 아니라 다붓한 논알코올의 밤도 충만한 행복으로 가득 찰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 충만한 행복의 밤이 바로 오늘의 논알코올 데이였음을 이해했다. 바로 오늘이, 우리들의 술 없이도 행복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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