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는 내 오랜 숙원이다.
술에 질려버릴 만큼 마셨다고 생각해도 또 음주로 회귀하는 본능을 막을 방법을 몰라 번번이 지고 마니, 숙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 정도면 일상생활 잘하고, 직장도 잘 다니고, 인간관계에도 문제없으니 그냥 술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알코올중독 자가진단을 해볼 수 있다는 사이트를 알게 되었고, 나는 재미 삼아 한번 해보지 뭐, 하며 진단에 참여했다. 첫 번째 문항부터 양심을 콕 찌르는 문장이 쓰여있었다. [얼마나 술을 자주 마십니까?] 많이 마실 때는 주 4-5회도 마시지만, 대체적으로는 주 1-2회를 마시니까... 중간값으로 보이는 주 2-3회에 체크했다. 열 개의 문항은 담담하게, 그러나 내가 외면하던 나의 모습의 정곡을 찔렀다. 모든 문항에 답변을 마치고 나온 점수는 26점. 사이트의 상단에는 25점부터는 ‘알코올 중독자로 전문적 입원치료 및 상담 필요’라는 문구가 기재되어 있었다.
내가 느끼는 나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편이었다. 술을 마시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아무튼, 금주> 5화 참고) 내 몸의 변화나 이상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곤 했다. 그래서 꾸준한 건강검진을 통해 신체에 이상이 있는지 자주 관찰했고, 우울감이나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을 막기 위해 최대한 예방적으로 대처했다. 그런 나에게 ‘알코올 중독에 의한 입원 치료’라니. 물론 자가 진단에 불과하여 아주 정확한 결과는 아닐 테지만, 내가 마시는 음주 행태가 입원 치료까지 권유될 정도라니 충격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단지 술을 좋아했을 뿐이고, 좋아하니까 자주 마셨을 뿐인데 알코올 중독이라니!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알코올 중독자는 초록색 소주병을 휘두르며 가족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고, 벌건 얼굴로 고성방가를 내지르며 길바닥을 헤집고 다니는 모습일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목이 마를 때 떨리는 손으로 물 대신 술을 유리잔에 콸콸 따라 꿀떡꿀떡 넘기고서는, 제대로 걷지도 서지도 못하면서 웃었다 울었다를 반복하며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수백 번 다시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나는 그 누구보다 멀쩡했다! 술을 많이, 자주 마셔도 다음날 직장에 멀쩡히 출근해서 일했고, 마음먹고 받은 건강검진에서는 그 흔한 용종 하나 없었다.
내가 알코올 중독이라고? 나는 내가 갓 스무 살이 되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할 때 보았던 뭇 알코올 중독자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오피스텔 아래에 위치했던 자그마한 개인 편의점에서 일했었는데 그곳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알코올 중독자들의 기본값들을 자주 목격했었기에 내가 그들과 같은 수준의 알코올중독이라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내가 그 아저씨랑 똑같을 리 없어!”
내가 일했던 편의점엔 언제 봐도 시커머죽죽한 낯빛에 붉은기가 가득한 단골 아저씨 한 명이 있었다. 그 아저씨가 편의점 근처에만 와도 편의점 안까지 술냄새가 진동했었기에 가게에 꼭 들어오지 않아도 ‘그 아저씨가 왔구나!’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백이면 백 술 냄새를 풍기며 가게에 들어온 아저씨는 스포츠 토토 종이를 내밀며 얼마어치를 바꿔달라 하곤 내가 기계로 토토 종이를 뽑는 동안 품에 막걸리와 소주를 한가득 계산대에 올려두었다. 아저씨는 올 때마다 비슷한 이야길 했다.
“내가 말이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 다녔어. 나도 이렇게 안 살았어. 아들도 알아. 내가 원래부터 이렇게 살지 않았다는 걸.”
나는 그 아저씨가 싫었다. 술, 담배, 믹스 커피로 찌든 악취를 풍기며, 지나가는 손님일 뿐인 당신의 왕년을 기억해 주고 인정해 주길 바랐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으면서 더 나아질 생각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아저씨의 말끝에는 꼭 아들이 붙었다. 자기 아들은 안다고 했다. 자신의 원래 모습을. 그 아들은 자신의 아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왕년엔 잘 나가던 아빠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하릴없이 스포츠 토토와 술에만 빠져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의 레퍼토리는 늘 비슷했으나 자신이 어쩌다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는지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과거의 영광만을 이야기했다. 그때의 나는 그 손님을 보고 늘 생각했었다.
저런 게 알코올 중독자구나. 계속 저렇게 살면 안 될 텐데, 병원에라도 입원시켜야 되는 거 아냐?
그런데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단지 술을 좋아해서 자주 마셨을 뿐인’ 내가 그때 그 아저씨와 비슷한 수준의 알코올중독이라는 수치가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내가 입원 치료를 요할 정도의 알코올 중독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제시된 문항에 최대한 양심껏, 성의껏 답변했고 그 결과는 냉정했기에 나도 더 이상 내 상태를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야,라는 합리화를 버리고 나를 한번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로 했다.
나는 저녁 식사를 하며 자연스레 반주를 즐긴다. 나는 맛있는 음식에 술을 마시지 못하면 아쉽다. 나는 술에 취하면 기억을 잃을 때까지 술을 더 마신다. 나는 폭음을 하고 집에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 채 집에서 깨어난다. 나는 가족과 애인이 나의 건강을 걱정하며 절주나 금주를 권한 적 있다…. 나는 웃어넘길 해프닝으로 치부했던 일상이 다소 병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술을 끊기 위해서 단순한 금주 다짐에서 더 나아가서 뭐라도 해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친구 S가 알코올 중독 치료를 위해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S의 말에 따르면 그 약을 먹으면 모든 욕구가 사라진다고 했다.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은 것은 확실하지만, 다른 모든 것들도 하고 싶지 않아 진다고 했다. 밥도 먹고 싶지 않고, 담배도 피우고 싶지 않고,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고, 그저 무기력해져 잠을 자고 싶어 진다고 했다. 실제로 오랜만에 만난 S는 제대로 먹지 않아 살이 쪽 빠진 상태였다. 지인은 나에게 약 먹을 수준까지 만들지 말고 지금 술을 줄이라고 조언했다. 자신의 의지로 가능할 때 실행하라고.
사실 S는 그동안 나와 즐겁게 술을 마시던 음주메이트 중 하나였다. S도 처음에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만 술을 즐기는 걸로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 집에서도 반주를 곁들이는 수준이 되며 음주가 잦아졌고, 결국 매일 술을 마시는 알코올 중독의 수준으로까지 진행된 것이다. 생각해 보니 나 역시 처음엔 친구들과 술자리에서만 술을 마셨으나 혼자 살게 되면서 가족들의 눈을 피할 수 있으니 저녁을 먹으며 자연스럽게 술을 찾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주말에만 1-2회 마시던 음주 횟수가 평일까지 주 4-5회까지 늘어난 것이다. 대신 음주 횟수는 크게 늘었지만 혼술이다 보니 만취까지 가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 다음날 일정에 지장을 주지 않으니 스스로 술을 즐기는 정도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과 회식을 즐기는 문화상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해 크게 경각심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알코올 의존증세를 보인다고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거기다 최근에는 젊은 여성들의 알코올 의존증 비율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1인 가구의 증가와 홈술, 혼술의 대중화, 하이볼과 같이 도수가 높지 않고 단맛을 앞세운 술들이 강세를 띠면서 전보다 여성들의 음주 경험 자체가 늘고, 신체 구조상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빨리 취하기 때문에 알코올 의존증상이 생길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란다. 그렇지만 본인이 알코올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사회·문화적으로 여성 알코올 의존 환자에게 더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경우가 많아서 여성들이 관련 치료에 소극적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본인이 잦은 음주 습관을 가지고도 술을 아주 좋아하는 정도라며 무마해 왔던 사람들을 자주 봐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부터 그랬다. 그렇지만 나를 포함한 그들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자신이 알코올에 심각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을 것이다. 편의점 단골이었던 아저씨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지 않으려고 과거의 영광만에 매여있었던 반면, S는 모든 욕구를 내려놓는 결심까지 하면서 중독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제는 내 차례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전자와 후자 중에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할까? 나도 지금은 즐거움을 위해 한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한잔, 우울함에서 도망치기 위해 한잔 마시고 있지만 이 한잔들이 모여 결국 입원이나 약물을 투약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S의 조언이 새삼 와닿았다. 내 의지로 멈출 수 있을 때 멈춰야 한다. 내가 알코올중독일리 없다고? 아니다. 나도 알코올중독일 수 있다.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다면, 이제는 정말로 멈춰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아래는 알코올중독 자가진단을 해볼 수 있는 사이트입니다!
https://health.gangnam.go.kr/self/check/alcoholism.do?mid=482-5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