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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해피 클린 뉴 이어

by 성새진 Jan 05. 2025
새해가 밝았다. 성인이 되고 난 근 십여 년 중 맑은 정신으로 맞는 거의 최초의 새해였다.


        나라에서 1월 1일을 국가공휴일로 지정해 준 덕에 적어도 숙취를 달고 출근할 걱정은 없었기에 애주가로서 송구영신의 기본값은 당연히 음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가 술 없는 클린 연말연시를 보내게 된 것은 내가 다름 아닌 ‘금주’ 에세이 저자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였으면 정말 좋았겠지만, 그렇게 되면 이 글이 에세이가 아닌 판타지가 될 수도 있기에 급하게 진실을 밝힌다. 갑자기 몸이 아팠다.     

 

        참담하고 슬픈 일들이 수습되지 못한 채 벌어져 있는 2024년이었다지만 마지막 날만은 끝장나게 맛있는 음식과 끝장나게 맛있는 술을 즐기면서 끝이라도 아름답게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오늘 당장 죽는다 해도 때깔이 고운 귀신이 될 정도로 잘 먹고 또 기분 좋게 취해서 새해의 1월 1일을 맞이하고팠다. 그런데 하필 2024년 12월 31일에 불상의 통증이 찾아온 것이다. 게다가 통증의 진원지가 몇 달 전 건강검진에서 혹이 발견된 바로 그 자리였던지라 걱정이 되어 당장 병원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여러 번 강조하지만 나는 술 먹는 것 외에는 건강을 지키기 위해 몸의 이상에 꽤나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냅다 병원으로 달려가긴 했으나 사실 그렇게 심각한 문제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병원 로비에서 진료를 기다리면서도 내 고민은 현재 신체 증세보다 2024년 마지막 주종에 더 기울어 있었다. 분위기를 내야 하니까 와인? 아니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주? 아무래도 새 마음 새 뜻이 중요하니까 새로운 전통주에 도전해봐야 하나?    

  

        그러나 막상 엑스레이, 초음파, 채혈, 조직검사까지 온갖 검사를 다 하고 나오니 ‘오늘 내가 한 주종 고민은 참 쓸데없는 고민이었구나’ 싶었던 게, 그동안 내가 술을 마시고 싶었던 적이 있긴 했나 싶을 정도로 술을 마시고 싶은 욕구와 의지가 자취를 싹 감췄기 때문이다. 그리고 술을 마시고 싶다 해도 두 시간 만에 멀쩡했던 몸에 조직검사로 인한 구멍이 두 개나 생겨 버려서 항생제와 소염 주사를 맞게 됐으니 더욱이 술을 먹어서는 안 되는 몸이 된 채였다.     


        모든 검사를 마치고 진료실에서 의사 선생님은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며 조직검사는 예방과 진단의 차원에서 실시했다고, 악성일 가능성은 적을 거라며 내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심시켜 주기 위해 애썼다. 그래도 조직검사라는 낯선 의료행위에 대한 불안과 암일 수도 있다는 걱정, 병원에 왔으나 경감되기는커녕 배가된 통증, 갑작스럽게 진행된 가지각색의 검사 이후 찾아온 현기증까지… 아! 빈약한 통장 잔고에 대단히 누가 되는 병원비도 포함해서 내 12월 31일은 본래의 계획과는 달리 극히 혼탁해지고 말았다.     


        올해는 유독 연말 기분이라는 게 나지 않았는데, 여기에 몸까지 좋지 않으니 왠지 더 우울했다. 별일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큰 병이면 어쩌지 하는 불안함이 자꾸 차올랐다. 나이 한 살 더 먹는 것도 속상한데, 몸과 마음, 통장이 모두 아픈 연말이라니. 게다가 금주는 2025년의 계획이었는데, 갑작스럽게 2024년부터 금주하는 사람이 되게 생겼다. 그것마저 억울했다. 오늘부터 금주할 생각 없었다고! 금주는 새. 해. 계. 획.이었다고! 억울하다고 핸들을 쾅쾅 치며 호소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어 외로웠다. ‘왜 하필 오늘 병원을 갔을까. 차라리 다음 주에 갈걸.’이라는 나답지 않은 생각도 잠시 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꿀꿀한 기분으로만 한 해를 넘어가기에는 내 손해였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거라는 뭇사람들의 조언도 있지 않은가. 긍정의 힘을 억지로라도 끌어올리려 2024년의 최대 유행어 중 하나인 원영적 사고, ‘럭키비키’를 떠올려 본다.

    

어차피 2025년부터 금주하려고 했는데, 2024년부터 금주 시작했으니 햇수로 2년 동안 금주한 사람 될 수 있는 거잖아? 완전 럭키비키잖아!      


        약간 정신 승리처럼 보일지 몰라도 확실히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나아지는 효과가 있는 것도 같았다. 여기다 ‘오히려 좋아’ 기술을 첨가해 보았다.     


만약 오늘 검사 안 했으면 새해에 금주고 뭐고 술 마시고 싶었을 텐데, 아무리 강제라지만 술 생각조차 안 나게 됐으니 오히려 좋은데?     


        진정한 ‘금주’를 위해서는 내가 나를 셀프로 설득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반드시 금주해야 할 정당한 사유를 제출했고, 스스로 기꺼이 납득했다. 오늘 병원에 갔던 게 차라리 좋은 일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가보자고’ 기술로 마무리!     


아무튼, 기왕 금주도 시작했으니 2025년에는 금주 에세이 저자답게 제대로 금주 가보자고!     


완벽한 빌드업이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친 것 치고는 아주 완벽한 세트 플레이였다고 생각한다. 이제 검사 결과만 별일 없다고 나오면 된다.     




        사실 그러고도 모자라서 불안을 혼자 짊어지지 못하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 몸 상태에 대해 토로했다. 솔직히 다시 생각해 보니 조금 철없고 못나 보이긴 하지만, 나이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어리광 피우고 싶었던 마음이라 생각하며 봐주려 한다. 아무튼 내 소중한 사람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별일 아닐 거라고 나보다 더 크게 소리쳐주었다. 그리고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장난스럽고도 진지하게 걱정과 위로와 용기의 말을 건네주었다. 스스로 억지스럽다시피 끌어올리려 했던 기분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랑하는 사람들의 위로 속에서 따스하게 녹아내렸다.     


        덕분에 내 인생에 단 한 번일 2024년 12월 31일이 초라한 불안 대신 그윽한 사랑으로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사랑을 취기가 없이 또렷한 시야로 응시하여 마음에 새긴다. 술을 먹지 않았으니 기억이 휘발되지 않을 것이다.


        이 시간을 갈무리하다 보니 역시 병원을 일찍 가길 잘했고, 어찌 됐든 술을 마시지 않게 된 것이 잘 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취하지 못한 것이 전혀 아쉽지 않다. 되려 밝아오는 새해를 맑은 정신으로 환영할 수 있어 기쁘다. 아무래도 올해에는 제대로 금주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긴다.


         2025년, 해피 클린 뉴 이어!




안타까운 참사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해야했던 모든 분들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새해에는 부디 모두 건강하고 아프지 않기를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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