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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Dec 24. 2023

아빠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사건의 축적으로 인식한다.


tvn 예능프로 <알쓸신잡>에서 정재승 박사가 한 말이다. 그  말인즉슨, 사건이 많을수록 같은 시간도 길게 느껴지지만 반대의 경우 시간은 상대적으로 짧게 느껴진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빠르게 '인식'되는 이유는 발생하는 '새로운 사건'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해가 지날수록 일상 속 번민과 반복에 찌들다 보니 매년 낱장만 남은 달력을 마주할 때마다 '한 해가 벌써 다 갔구나'는 푸념이 늘어난다. 나 역시 30대 중반에 들어서며 점점 시간의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지만, 올 한 해 아빠가 되면서 겪은 새로운 사건들 덕분에 평소보다 0.8배속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아기가 태어난 뒤 패밀리앨범이라는 어플에 사진을 주기적으로 업로드하고 있다. 친가, 처가 부모님 모두 볼 수 있는 공유앨범 어플이다. 아기가 처음 태어났던 2월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바일 앨범에는 아기 사진이 빼곡하다. 내 핸드폰 배경화면에는 이 앨범어플의 위젯을 깔아 뒀는데, 종종 몇 개월 전 오늘 사진을 무작위로 보여준다. 그때마다 흠칫 놀란다. 우리 딸이 이렇게 생겼었다고? 불과 3개월, 6개월 전인데 마치 3년, 6년은 흐른 것처럼 까마득하다. 현실감이 없어서 배실배실 웃으며 주위를 어지럽히고 있는 아기를 바라본다. 벌써 이렇게 컸다고? 과거와 현재 아기의 모습의 회귀분석 결과는 항상 E=mc²상대성 이론처럼 받아들이기 어렵고 놀랍다.


아기는 이제 만 10개월을 지나면서 점점 할 수 있는 게 늘어간다. 언제쯤 뒤집기에 성공할까. 언제쯤 기어 다니기 시작할까. 언제쯤 일어날 수 있을까. 언제쯤 옹알이로 아빠 엄마를 부를 수 있을까. 항상 아기에 대한 조바심과 기대감을 안고 지낸다. 아빠의 조급함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기는 때가 되면 와락 해내고 만다. 성공의 순간을 위해 70cm가 안 되는 작고 통통한 생명체는 부단히 애를 쓴다. 역류방지쿠션(a.k.a 역방쿠)에 아기를 엎드려 눕힌 뒤 처음으로 목을 가눴을 때, 바닥에 누워 낑차낑차대며 한쪽 허벅지를 움직이는 반동으로 뒤집기에 성공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아기를 봤을 때, 무릎으로 밀어내는 힘을 이용해 매트 위를 누비기 시작했을 때, 장난감 보행기에 두 손을 손잡이에 올리고서 주방과 거실을 신나는 표정으로 처음 가로질렀을 때, 앉아서 사부작대다가 도움 없이 혼자서 몇 초간 처음 일어났을 때. 이 모든 순간들은 내게 환희와 경이로움 자체였다. 앞으로 아기의 '첫 순간'을 목도할 시간이 너무나도 많이 남아있어 가슴이 벅차다.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조그마한 움직임들, 지금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언형(言形)을 갖추지 않은 옹알이들, 지금이 아니면 맡을 수 없는 접힌 뒷목 사이의 푸근한 아기냄새. 그렇게 10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나의 오감과 지각은 아기와 관련된 사건들로 가득했다. 산후조리원에서 모자동실 시간에 아기를 어찌 안을지 몰라 허둥댔던 때는 고문헌에 기록될 이야기가 됐다. 하루하루 새로운 사건들을 겪으며 나는 조금씩 아빠의 형태를 갖춰가고 있다.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은 '크로노스'다. 이에 비해 주관적으로 인지하는 시간은 '카이로스(kairos)'라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카이로스는 기회의 신이다. 앞머리는 길고 풍성한 데 반해 뒤쪽은 민머리이고, 등과 두 발목에 날개가 달려있다. 즉, 카이로스는 마주하고 있을 때만 잡을 수 있다. 카이로스가 뒤돌았을 때는 이미 늦다. 기회는 왔을 때 잡지 않으면 달아난다는 의미다. 로마인들은 카이로스를 오카시오(Occasio)라고 불렀다. 기회(occasion)의 어원이 여기서 왔다. 


아빠가 되고서 나는 카이로스의 머리채를 있는 힘껏 세게 움켜쥐고 있다. 아기와 함께하는 시간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싶다. 우주처럼 깊은 아이의 눈빛을 영원히 담을 각오로 바라봐야 한다. 흘러간 시간이 벌써 아쉽다고 느껴질 만큼 시간을 느리게 보내고 싶다. 아이의 땡깡이 늘어나고 아이 때문에 좌절하며 힘든 순간들도 분명 오겠지만 괜찮다. 내 마음속 바다는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지만 힘차게 흐른다. 동시에 시간은 깊고 느리게 흐른다. 아기가 만들어낸 인력(引力)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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