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된 '정신 나간 사람'
초등학교는 8살 1학년부터 사춘기에 접어든 13살 어린이까지 각 학년마다 성숙도가 다른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다.
중학교에 가면 병아리처럼 선배들의 눈치를 보게 될 6학년 아이들도 이 안에서는 대장이며, 심지어 선생님 위에서 대장을 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요즘 아이들은 발육 상태가 좋아 내 키를 훌쩍 넘는 경우가 많다. 6학년 담임을 자주 맡는 나는 종종 키가 작아 아이들을 올려다봐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그래서 아이들을 혼낼 상황이 생길 때는 먼저 아이를 의자에 앉혀 눈높이를 조절한 후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방법은 찾아냈다만 키가 크지 못한 것이 어렸을 때 우유를 먹지 못해서인가 하고 넉넉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을 아쉬워할 때도 간혹 있다.
몸도 마음도 크고 있는 녀석들은 선생님에게 말대꾸를 하며 수업을 방해하거나 체육 시간 단체경기 중 규칙을 지키지 않고 몸에 공을 맞아도 아니라고 우기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럴 때 교사가 지적을 하거나 퇴장 명령을 하면 교사에게 욕을 하며 몸으로 위협하는 학생도 있기 마련이다. 특히 이런 일은 학기 초에 일어나는데 속된 말로 ‘교사가 어떤 사람인지 간을 보는 것’이라고나 할까?
평소 나는 조신하다. 정말이다. 그러나 그럴 때 나는 미. 친. 년. 이 된다.
너 지금 **이라고 했냐? 누군 **이라고 못 해서 안 해? 어디서 **이야.
고음으로 소리 지르지 않는다. 배에 힘을 주고 복식 호흡을 하며 (여기서 눈이 중요한데) 한시도 그 아이에게서 눈을 떼면 안 된다. 심지어 깜빡여서도 안 된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 아이가 했던 욕을 더 맛깔나고(?) 자연스럽게 발음하며 아이가 했던 욕을 상기시키는 것 같지만 위장이다.
그러면 아이는 눈빛이 흔들린다.
눈을 내리깔고 복종을 할 것인가? 아니면 더 가볼 것인가?
교사는 여기서 절대 흔들리면 안 된다. 여전히 눈을 부릅뜨고, 언제든 포스 있는 목소리로 제압할 준비를 해야 한다.
여기까지 읽고 교사가 ‘교사답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답다’는 말은 사람을 틀 안에 가두는 느낌이 든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교사는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할까? 체벌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학생에게 욕까지 들어가며 아이들 앞에 서 있을 자신이 없으니 나름의 생존 방법을 찾아낸 것.
그것이 다수의 다른 아이들을 위해서 더 낫다. 이런 상황에서 교사가 무너지면 그 아이와 비슷한 성향의 아이가 또다시 항명(?)을 하고, 그럼 교실 분위기는 '공부여, 안녕~, 질서여, 안녕~'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가끔 질서가 깨져버린 교실을 보곤 하지만 학급은 각각의 자치 구역으로 그런 분위기를 외부인이 바꿀 수 없다. 그렇게 1년 동안 아이들은 선택하지 않은 무질서한 교실 상황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하는 게 더 많은 아이들을 위한 거라고 나를 정당화한다.
다시 아이와의 대치 상황으로 가보자. 이제 아이는 어떻게 할 것인가? 보통은 이쯤 되면 포기를 선언한다. 앞으로의 순탄한 학교생활을 위해 선생님을 대장으로 인정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이가 상황 판단이 빠른 경우, 한 번에 깨닫는다. 물론 한 번 더 도전하는 경우도 있으며, 끝내 교사와 관계를 맺기를 거부하고 1년 내내 방황의 시간을 보내는 아이도 있다.
한참이나 어린아이들과 생활하며 느끼는 감정 노동은 때로 교사를 우울하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아이들을 가르치고 서로 성장하는 즐거움은 무엇에 견줄 수 없을 만큼 보람되지만 매번 그런 것은 아니므로. 방학은 아이들을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마음을 세팅해준다.(감사합니다.)
엄마가 행복해야 가정이 행복하다고 했던가? 교사가 행복해야 아이들이 행복하다. 법륜 스님의 책 <행복>에 “어떤 순간이라도 우리는 행복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을 좋아한다. 아이들과 보대끼며 감정 노동으로 힘들어도 나는 행복을 선택한다. 가끔 계산된 ‘정신 나간 사람’이 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