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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맛있는독서 Nov 21. 2023

12. 이유를 모르는 기다림 속 허무하게 지루한 수다들

<고도를 기다리며> 사뮈엘 베케트, 오증자 옮김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게 아니야. 문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뭘 해야 하는가를 따져 보는 거란 말이다. 우린 다행히도 그걸 알고 있거든.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p167)



 어릴 때 많이 듣던 말 중에 “어른(또는 대학생)이 되면~”으로 시작하는 잔소리가 있었습니다. 마치 어느 순간,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나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때가 올 듯한 표현이었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 역시 어른들이 말하던 그 ‘때’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 올지, 왜 오는 건지, 오기나 하는 건지 아무도 모릅니다. 기다림은 시간을 삭제합니다. 그 순간은 매분 매초 지루함으로 죽을 것 같지만 어느새 흐른 시간은 어제가 하루 전인지 한 달 전인지, 혹은 몇 년이 흐른 건지 망각하게 합니다. 글 속의 등장인물,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은 매일매일의 반복으로 어제가 언제인지 불분명한 오늘을 사는 것 같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블라디미르는


“아직 다 해본 건 아니잖아”(p.5), 

“작은 일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p.9) 

“셋이 다 거기 한자리에 있었다니까. (중략) 왜 나머지 세 사람 얘기는 제쳐놓고 그 사람 말만 믿는지 모르겠다니까.”


라며 자신을 채근하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에스트라공은 매번 헤어지자고 말하지만 그러지 못합니다.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 속에 두 주인공이 만담처럼 주고받는 대화를 읽다 보면 꿈을 그린 화가 달리의 그림이 떠오릅니다. 언제 풀릴지 모르는, 멈춘 시곗바늘 속에 갇힌 느낌이랄까요? 그들은,

 

“가자” 

“가선 안 되지”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를 반복합니다. 어쩌면……. 무한 반복되는 듯 무료한 기다림 속에 있으면서 선택지 중 하나였던 ‘죽음’을 실행하지 않는 이유가 자신들은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건 이런 상황에선 시간이 길다는 거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우린 온갖 짓거리를 다 해가며 시간을 메울 수밖에 없다는 거야. 뭐랄까 얼핏 보기에 이치에 닿는 것 같지만 사실은 버릇이 되어버린 거동을 하면서 말이다. 넌 그게 이성이 잠드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짓이라고 할지 모르지. 그 말은 나도 알겠다. 하지만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성은 이미 한없이 깊은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야. 너 내 말 알아듣겠냐?
(p.168)     

남들이 괴로워하는 동안에 나는 자고 있었을까? 지금도 나는 자고 있는 걸까? 내일 잠에서 깨어나면 오늘 일을 어떻게 말하게 될지? 내 친구 에스트라공과 함께 이 자리에서 밤이 올 때까지 고도를 기다렸다고 말하게 될까? (중략) 하지만 이 모든 게 어느 정도나 사실일까?
(p.192)     

 작가 사뮈엘 베케트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으나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였습니다. 20세기 부조리극을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실험 문학의 대표 소설가, 시인, 방송작가였습니다. 소설 3부작 <몰로이> <말론 죽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등이 있으며 희곡은 <승부의 종말> <오, 행복한 날들>이 있습니다. 시집은 <호로스코프> <에코의 뼈들 그리고 다른 침전물들> <시들> 등이 있습니다. 사뮈엘 베케트는 또 다른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가 자신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도전했는가? 실패했는가? 괜찮다. 다시 시도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나은 실패를 하라."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2막 부조리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호한 설정과 배경, 전개를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작가 사뮈엘 베케트는 우울증과 자폐 성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말년에는 아내와 둘만의 삶에 집중하는 폐쇄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보이는 연극 무대는 그의 폐쇄적인 성향이 반영된 것으로 짐작 수 있습니다. 삶을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을 일관성 있게 지루하고, 산만하게 그려내다니! 정말 매력적입니다. 바로 이 점이 부조리극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조리극은 고독, 소통의 부재를 드러내므로 불합리함 속,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으며 난해하다고 느끼거나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등장인물의 대화나 시간의 흐름이 매우 모호하게 표현됩니다. 삶에 대한 목적성이 강한 독자라면 주인공들의 무의미한 대화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부조리극에서 '인간은 목적 없이 세계를 표류하는 존재'라는 것을 상황으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라는 것에 깊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끝까지 인지합니다. 그 지루한 나날의 반복이 거듭되지만 자신들이 선택할 수도 있는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 모습에서 독자 자신의 삶에 대한 사유가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한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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