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졸업생들이 찾아온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힘들었을 때 함께하면서 격려해 주고 희망을 주어서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보람과 기쁨을 느끼곤 한다. 찾아와 주기는커녕 전화 한 통 주지 않는 아이들도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운한 감정이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서운한 생각 전혀 들지 않는다.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을 생각해 냈기 때문이다. 2·30년 전의 사람을 애타게 찾는 모습, 만나고 나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쓰도록 만들었다.
찾아와 주지 않는다고/ 기억하지 않는 것 아니다./ 전화 주지 않는다고 잊고 사는 것 아니다/ 편지 주지 않는다고/ 관심 없는 것 아니다.// 그 어디에선가 그대를 때때로/ 어쩌면 강하고 강하게/생각하고 있다./ 지금도 만나보고 싶어 하고 있다//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오늘에서야 알았다.
표현하는 사랑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마음만 있어도 충분한 것 아닐까? 누군가 나를 기억해 주고 사랑해 준다는 것을 생각할 때 기분 좋지 않던가? 사람은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특히 쑥스럽다는 이유로, 또 미루고 미루다 보니, 특별한 기회가 없어서 표현하지 못하고 지나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특정한 그 누구가 아니라 인간 대부분이 그렇게 산다. 서운해할 이유 없다는 말이다. 서운해하는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반문하고 싶어 진다. “그대는, 그 누구에게 얼마나 관심 가져주고 또 표현하며 살고 있는가?”라고.
두 번째 시집을 내면서 제목을 인지상정으로 잡고 오랜 시간 즐거워하였던 기억이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감정이나 마음인 인지상정(人之常情). 이 인지상정에 대해 요모조모로 생각하면서 일곱 편의 시를 쓴 이후, 인간에 대한 이해가 생기게 되고 용서가 쉬워지고 사랑이 샘솟았고 평화가 찾아왔고 삶이 좀 더 즐거워졌다. 다음과 같이 끼적여보기도 하였다.
“잘못했음 깨닫고서 미안하다는 말 하려 하였는데/ 시간을 놓치고, 그 뒤엔 어색하여서/ 끝내 말하지 못하였던 경우가/너에게도 있지 않았느냐?/이해하고 또 이해하라/ 그리고 용서하라.”
인간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한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키도 몸무게도 손도 발도 머리도 정말로 대동소이하고, 생각하는 것도 욕망도 감정도 대동소이한데 눈에 보이는 외모마저도 같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자신이 많이 잘났고 자신의 생각만이 현명하다고 우겨댄다. 인간이란 얼마나 어리석고 왜소한가? 어쩌면 어리석고 왜소함까지도 인간 모두는 비슷한 것 아닐까? ‘돈 싫어하는 사람 없다’ 하였고, ‘잠에는 장사 없다’ 하였으며,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프다’라고도 하였다. ‘뒷간에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 다르다’고 하였고, ‘사흘 굶어 담 아니 넘을 놈 없다’라고도 하였다. 이 모두 인지상정(人之常情)을 표현한 속담 아닌지?
자신의 실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남의 실수는 용납하려 들지 않는 것 역시 인지상정이다. ‘그래 너도 인간이다.’ ‘그래 너 아직 고등학생이다.’ ‘그래 너 아직 경험해 보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얼마나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지? 인지상정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말이 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가 그것이다. ‘바꿀 역(易)’‘처지 지(地)’‘생각 사(思)’‘그것 지(之)’로 입장을 바꾸어서 그것을 생각하라는 말이다. 입장 바꾸어 생각하면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되고 사랑이 생긴다.
인지상정은 정말로 마음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나 역시 아직 훈련이 덜 되어 항상 그러는 것 아니지만 예전에 비해 요즈음은 아내의 신경질에도 어느 정도 웃음으로 받아넘길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각하는 아이에게도 야단치지 않는다. 살다 보면 늦을 수 있고 굳이 야단치지 않아도 스스로 잘못 깨달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성적으로 야단쳐본 기억도 없다. 본인의 마음이 훨씬 괴롭다는 것 알기 때문이고 스스로 반성하고 새롭게 시작하리라 믿기 때문이며 야단치면 좋아지고 용서하면 나빠진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만 이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비슷하다. 외모도 생각도 감정도. 인지상정임을 중얼거리게 되면 분노가 사라지고 이해와 용서가 쉽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