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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승호 Apr 10. 2024

떠나보냄은 아름다움입니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의 한 구절입니다. 이 노랫말처럼 우리는 소중한 사람과도 미운 사람과도 아끼던 물건과도 그리고 시간과도 매일 이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이별을 두려워하며 망설였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별이 있어야 새로운 만남도 가능하다는 평범한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이별을 받아들이니 이제는 죽음이라는 이별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고, <이별은 미의 창조>라는 한용운의 시도 새롭게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 없는 황금과 밤의 올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한용운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이별이 아름다운 이유는 재생의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들도 미소 지으며 아이를 자신의 품에서 떠나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 내가 돌봐 주고 간섭하지 않으면 잘못된다는 생각들을 가능하면 빨리 떨쳐 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워 말고 떠나보내도 괜찮습니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돌봐 줄 사람이 있음을 믿어야 하고, 인간은 누구라도 스스로 잘 적응해 가면서 스스로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음도 믿어야 합니다. 

 어느 순간 장성하여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들이 어쩌다 집에 오게 되었을 때, 집에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나와 아내의 바람과 달리 아들은 친구를 만난다며 부리나케 집을 뛰쳐나가곤 했습니다. 예전에는 서운했고 또 그 서운함을 꾸짖음으로 연결시키기도 했는데 이제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입니다. 저 역시 그 나이에는 그랬음을 기억해 냈고, 부모가 줄 수 없는 즐거움과 깨달음을 친구들은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러운 생각과 행동임을 깨달은 지금은 재미있게 놀고 오라며 손을 흔들어 줍니다. 

 아들딸 못지않게 아들딸의 친구들이 예쁘고 소중한 이유 역시 그 아이들이 내 아들딸에게 기쁨을 주고 성장을 도와주며 내가 줄 수 없는 행복을 채워 주는 고마운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친구는 가족들이 줄 수 없는 맛과 재미를 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바쁘고 거리가 멀어도 기쁜 마음으로 친구를 만나러 달려가는 것을 보면서 우정이 가져다주는 행복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 생각해 보곤 한답니다. 

 어머님 살아계셨을 때, 주말마다 노쇠하신 어머니를 찾아뵈었습니다. 무릎이 시리고 허리가 쑤신다는 호소에 어찌해 드릴 수 없는 무력감을 느겼지만, 더 큰 무력감은 자식임에도 정신적인 빈 공간을 채워 드릴 수 없다는 것에서 왔습니다. 어머니와의 대화가 한 시간을 넘기기가 쉽지 않음을 확인하면서 우리 삶에서 친구의 역할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 깨닫곤 했습니다. 아무리 효자, 효녀라 해도 친구 역할까지 대신하기 어렵다는 사실 앞에서 아이를 품안에 품고 살려는 마음이 잘못된 생각임을 깨닫고 떠나보내는 것이 옳음을 확인합니다. 

 학생들에게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이라는 제목을 주고 글을 쓰도록 하였더니 적잖은 아이들이 ‘친구’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공부하기 힘들고 입시 때문에 짜증나는 일이 많음에도 그런대로 학교생활이 재미있는 이유가 친구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척박한 교육 환경에서도 아이들은 친구가 있기에 기쁘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으며, 친구와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가능하면 일찍 기쁜 마음으로 자녀를 떠나보내고 자신들만의 취미를 즐기거나 홀로 또는 부부끼리 또는 친구끼리 어울려 노는 연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에 ‘올인’하는 것은 자녀를 힘들게 하는 일이고 동시에 자신도 힘들게 만드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대들의 아이들은 그대들의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삶을 갈구하는 생명의 아들이자 생명의 딸입니다. 아이들은 그대를 거쳐서 왔으나 그대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비록 그대들과 함께 지낸다 하여도 그대들의 소유물은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그대들의 사랑을 주되 그대들의 생각까지 주지는 마십시오. 아이들 스스로도 생각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몸이 머물 집을 주되 영혼이 머물 집은 주지 마십시오. 아이들의 영혼은 그대들이 꿈에서라도 감히 찾을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기 때문입니다.” 

 칼린 지브란의 <예언자>에 나오는 이 구절을 음미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떠나보내야 합니다. 떠나보냄은 선택이 아닌 의무인 거지요. 

 아들딸이 제 품을 떠나 버린 지금에야 ‘자식은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 봅니다. 저 역시 부모님에 의해 세상에 나왔고 자랐으면서도 부모님의 소유물이길 거부했음을 망각한 채, 아들딸을 나의 소유로 생각하고 나의 로봇이 되길 원하였으며 믿지 못하여 늘 안절부절못하고 간섭하려 했으며 대신 판단해 주려 했던 것이 부끄러움으로 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잘할 수 있지만 너는 스스로 할 능력이 없으니 내가 도와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못난 생각임을 아들딸이 결혼할 나이가 되어 버린 지금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형기의 시 <낙화>를 음미하면서 인간은 이별을 통해 더 성숙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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