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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경별진 Feb 13. 2022

페르시아의 흠

요즘에는 새로운 관계를 만나게 되면 가끔 내 지난 이야기가 하고 싶어 진다.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느 날엔 대화가 더 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나를 잘 모르기에,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들은 종종 내 이야기를 듣고 과도한 피드백을 해주고는 한다. 어떤 날에는 피드백을 원하는 것이 아닌, 그저 내 이야기가 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래서 피드백을 자주 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는 것 같다. 나를 걱정해서가 아닌, 내 선택의 옳고, 그름의 영역까지 넘어오려고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상대가 좋고, 행복한 이야기만 한다면 듣는 것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으니,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도 들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면 대화의 시간이 조금은 어렵게 느껴진다.


코로나 시대로 사람을 만나는 일이 어려워지니 관계를 만드는 일이 조금 어렵거나 어색하게 느껴진다. 인간의 적응력은 생각보다 뛰어나다. 어떤 삶을 맞이하든, 그 삶에 점차 적응을 해간다. 어색하기만 했던 비대면이 이제는 익숙해지고 있는 듯하다.


아무튼, 어쩌면 나는 일방적으로 내 이야기를 털어내고 싶어서, 또는 마음 깊이에 있는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어서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시작했지만 이제는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지금은 내가 글을 쓰는 것이 내게 가장 일방적이고, 자유이고, 주체적일 수 있고, 해소하는 통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랜 회사 생활로 이곳저곳 확인받고 일하는 것이 익숙해져 버린 내가 유일하게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글 쓰는 일이 되어버렸다.


유일하게도, 글 쓰는 일이 내 의지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일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얼마 전에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무기력해져 있었는 가. 사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져 글을 쓸 수가 없어서 한 달 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몇 년 동안 꾸준히 썼던 글인데,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쓰고 싶지도, 소재도 없었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이 뭐냐고 물어보면 글 쓰는 일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대단한 무언가가 되려고 하는 것도 아닌, 이제는 글이 나고, 내가 글이 된 것 같다. 내 모든 삶이 글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고집이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도 침범당하고 싶지 않고 지켜내고 싶은 자신만의 소신 같은 것 말이다. 가끔 이런 각자의 고유 시각들을 가볍게 여기고 하찮게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의 것을 건드는 일에는 불 같이 화를 내는 특징이 있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은, 다른 이 도 소중한 것일텐데 말이다.


글은 내 삶이다. 여전히 쓰이고 있는 중이지만, 나의 삶들이 모두 기록되어있다. 아직도 글 안에 남아있는 아빠를 기억하고, 나를 기억하며 내 과거를 읽는다. 과거가 '나'임을 다시 기억해내고, 과거로 인해 만들어진 지금의 '나'를 다시 바라보곤 한다.


나는 과거가 부끄럽지 않았다. 그래서 글로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내 삶을 보는 것은 두려웠다. 그래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여전히 청개구리다. 그리고 내 안에서는 해야 함과 안 함이 항상 싸운다. 그래서 나는 보이고도 싶고, 보이지 않고도 싶다. 누군가 내 삶을 들여다보는 일을 허락하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삶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삶을 이해해줄 사람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래서 가끔 지인들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 '결혼을 앞둔 사이에는 과거의 가정사를 다 이야기해야 하죠?' 그러다 나를 잘 아는 지인이 이렇게 말했다. '너는 왜 네 삶을 흠이라고 생각해? 그게 너이고, 네가 살아온 삶인데 말이야. 흠이 아니야. 너희 가족은 좋은 사람들이야.'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나는 나의 아픈 과거를 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상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와 내가 살아온 삶, 우리 가족들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나만큼 다른 이 도 우리 가족을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조금의 흠집조차 보이기 싫었던 것 같다. 내 안에 어린아이가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만들어낸 애잔한 방패막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생각의 각도'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고대 페르시아의 카펫 직조공들은 아름다운 문양과 섬세하게 짠 카펫에 의도적으로 흠을 하나 남겨둔다고 한다. 오직 신만이 완벽하며,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을 '페르시아의 흠'이라고 한다.


더 완벽한 행복과 더 완전한 삶에 집착하는 우리에게 '불완전함이야말로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니 완벽함을 추구하려고 전전긍긍하지 말고 불완전함을 평화롭게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을 준다.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운 이는 완벽을 추구하지 않는다. 불완전하다고 비난하거나 질책하지도 않는다.


내 삶이 흠이 아니라고 했던 지인의 말에 내가 내 삶의 한 조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흠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는 내 삶이 슬프고 소중하고 사랑스러워 매일 글로 기록한다. 누군가가 읽어줬으면, 아니 읽히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까지도.


누군가가 바라볼 때는 예쁘지 않은 흠으로 보일 내 삶을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예뻐 보일지, 않을지 모를  삶의  순간들 '페르시아의 '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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