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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Nov 13. 2023

정의-저울과 칼

정의는 아직 살아있는가. 선과 악을 판별하고, 모두에게 공평한 정의의 기준은 이제 사라지고 만 것인가. 도대체 정의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정의가 존재한다면,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불의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강자들의 세상에서 약자들은 언제까지 천대받고 무시당해야 하는가. 인도의 시인 가자난 미쉬라(Gajanan Mishra)는 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불의에 항거했다. 그리고 오랜 고뇌와 좌절의 질곡을 거쳐 자신의 시에서 이렇게 탄식한다.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 그것에 대해 말도 하지 말라. 그것은 역겹고, 따분할 뿐이니...” 전체주의 사회에서 정의는 권력이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의는 돈일 뿐이다. 그래서 오늘날 정의를 부르짖는 것은 허공을 맴도는 의미 없는 외침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무의미한 외침에 귀 기울인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 역겹고 따분한 정의가 무엇인지를 자문한다. 


법과 규범의 함정


2008년 캘리포니아 대학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 연구팀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뇌에서 정의와 비슷한 개념인 ‘공정함’에 반응하는 부분은 쥐가 ‘음식’에 반응하는 부분과 동일하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공평하게 취급받고자 하는 것은 식욕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욕구이다. 즉 정의를 갈망하는 것은 우리의 본능이다. 이런 이유로 정의롭지 못한 세상, 공평하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은 가장 본능적인 욕구를 억압당하고 있는 것이다. 신분, 재력, 피부색, 정치적 신념의 차이로 불공평한 대우를 받지 않는 것, 인간으로서 지니는 귀중한 천부의 인권을 보장받는 것이 정의라면, 오늘 우리는 분명 정의가 실종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국의 철학자 홉스(Thomas Hobbes)는 인간은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연권’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무절제의 권리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the war of all against all)의 상태를 초래한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자연권을 제한하고 사회계약을 통해 국가라는 공동체를 형성한다. 홉스의 사회 계약설이다. 본능에 따른 무질서에서 벗어나, ‘공평함’을 이루어내려는 서로 간의 약속, 그것이 정의의 본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약속을 어기고, 정의와 공평함이 힘 있는 자들을 위해서만 봉사하는 많은 경우들을 목격한다.    


정의의 혼란


192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캐리 버크(Carrie Buck) 사건은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한 개인의 삶을 얼마나 잔인하게 파괴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우생학적 불임 법안’ (eugenic sterilization law)은 태생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 국가가 불임시술을 강제로 시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캐리는 정신박약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어머니가 정신박약자들을 수용하는 시설에 보내진 후, 캐리는 양부모에게 입양되었지만 학대 속에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리고 양부모의 조카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고 임신한다. 그녀의 양부모는 집안의 수치를 감추기 위해 캐리를 부도덕한 정신 질환자로 만든다. 그리고 그녀가 딸을 출산한 직후 정신병원으로 보낸다. 당시 미국에는 우생학이 유행해 정신박약아나 신체장애자들을 열등한 존재, 사회적으로 불편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수용소에서 캐리는 자신과 어머니 그리고 딸아이 모두가 저능아라는 조작된 이유로 불임수술을 강요당한다. 결국 캐리 사건은 법정으로 옮겨지지만, 거짓된 증언들이 이어진 재판은 그녀에게 불임수술을 받을 것을 판결한다. 캐리 사건은 40만 명의 유태인들에게 강제 불임수술을 시행한 나치 전범들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한 법적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캐리 재판은 우리에게 법과 정의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법이 정의롭지 못할 때 과연 우리는 법을 지켜야 하는가?’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 법학과 스티븐 러벳(Steven Lubet) 교수는 자신의 책  ‘정의가 곧 법이라는 그럴듯한 착각’(The Importance of Being Honest)에서 법과 정의가 혼돈되는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월마트의 사진관에서 근무하던 한 직원이 불법 사진을 보고 신고했다가 고객의 비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해직된다.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직원으로서의 의무가 상충되는 이 상황은 정의가 무엇인가에 의문을 던진다. 법정은 월마트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개인의 의무와 권리는 결국 법에 의해 훼손되고 말았다. 이 경우 과연 정의는 무엇인가? 법의 정의는 과연 올바르게 행해졌는가?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 교수는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에서 정의를 판단하는 기준을 ‘행복, 자유, 미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의의 기준은 상황에 따라 지극히 다양한 판단들을 수반한다. 샌델 교수는 정의에 대해 판단을 내려야 하는 다양한 경우들을 제시한다.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부자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해야 하는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잘못인 때도 있는가, 도덕적으로 살인을 해야 할 때도 있는가. 비행기 사고로 눈 덮인 산속에 고립된 사람들이 이미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을 먹어 생존한 것은 정당한 일인가.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를 몰던 기관사 앞에 다섯 사람의 인부가 있다. 그리고 비상 선로 위에는 한 인부가 일하고 있었다. 기차의 방향을 비상 선로 쪽으로 돌려야 하는가. 다섯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한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것은 정당한 일인가. 그가 제시하는 예들은 정의의 기준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에 의문을 던진다. 정의는 정해진 원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정의는 포괄적인 인간의 행복, 자유로움 그리고 올바른 미덕이 적절히 배분되어 이루어지는 유동적 개념일 수밖에 없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Justitia)는 한 손에 저울, 다른 한 손에 칼을 들고 있다. 저울은 개인 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해결을, 칼은 주로 사회를 파괴하는 자들에 대한 처벌을 의미한다. 한편, 저울은 엄정한 정의의 기준이고, 칼은 그러한 기준에 의해 정의를 실현하는 힘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또한 정의의 여신은 두 눈을 안대로 가리고 있다. 정의와 불의를 가릴 때, 어느 한 편에 치우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현대의 여신은 더 이상 안대가 필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스스로 정의의 개념을 세우고 상황을 보아 자신의 저울과 칼을 적절히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긴 그녀가 아직도 저울과 칼을 들고 있을지 의문이긴 하지만 말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정의와 관련된 다양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정치권력과 검찰 권력이 누가 옳은지, 누가 강한지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일반 대중들은 별다른 생각 없이 그 한 편에 줄 서고 있다. 정의는 오만, 편견, 이기심, 무오류에 대한 확신, 오기, 분노, 동정, 그리고 두려움 따위에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겸손함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지켜져야 한다.”는 구호보다는 정의를 통해 제 한 몸 지키기도 힘든 약자들을 돕는 선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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