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한둘 무렵이었을까? 길을 걷다가 갑자기 나 자신이 너무도 하찮고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든 가능했고, 가장 자신감에 넘쳤어야 할 나이 아니던가? 왜 그리 못난 생각이 들었을까? 돌이켜 보니 그 당시 애인도, 친구도, 붙잡아줄 스승도 없다는, 상실과 외로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평생을 살면서 그보다 더한 막연함에 부딪혔을 때가 많았을 텐데 왜 그 순간의 기억만이 또렷할까?
어느 나라의 하급관리 한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코’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다. 며칠 후 그는 자신의 코가 고관대작의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것을 본다. 놀란 그는 코에게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줄 것을 간청하지만 코는 이미 높은 자리에 올라 도무지 돌아갈 생각이 없다. 이 정도면 누구라도 당황할 만하지 않겠나? 코가 없어진 것도 황당한데 그것이 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 나를 굽어보다니!
무슨 만화영화나 판타지에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사실은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이 쓴 ‘코’라는 제목의 단편 줄거리이다. 제 코를 잃어버린 사람들. 그들이 느낄 당혹감과 두려움. 그것이 젊은 내가 가졌던 그 순간의 느낌이었을지 모른다. ‘내 코가 어디 갔지? 냄새는 어떻게 맡고 숨은 어디로 쉬지?’
캄캄한 밤, 망망대해에 홀로 떠있는 것 같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파도가 쳐서 숨을 쉴 수도, 앞을 분간할 수도 없다. 그런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는가? 짧은 순간에라도 그런 공포가 엄습하는 경험은 그리 드물지 않다. 숨이 쉬어지지 않고 생각도 할 수 없던 절박감. 하지만 우린 그 순간을 곧 잊어버린다. 왜냐면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숨 쉬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아픔과 고통은 사라지면 망각된다. 그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끈질기게 붙어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고통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숙명적으로 안고 사는 그것이다. 왜 태어나 겪지 않을 고통을 받고 있는가 하는 막연한 의문이다. 또 하나 잊히지 않는 고통이 있다. 수치심.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뛰고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은 부끄러움이 그것이다. 그 감정은 남의 눈을 의식할 때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홀로 있을 때, 눈 감고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며 경험하는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수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혼자 남겨졌을 때 가끔 우리는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 자신의 오만에 대해, 이중성과 부족함에 대해, 무지와 편견에 대해 한 없이 부끄러워진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타인에 대한 혐오에 빠지기도 한다. 왜 저런 인간들과 마주쳐 이야기해야 하고, 함께 살아야 하는지를.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고쳐지지 않는 인간의 천박함에 대해 수치와 혐오를 느낀다. 결국 그들의 모습 속에서 나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한 없이 관대하고 남에게는 의심과 경멸을 드러내는 그 어리석은 족속에 나 역시 속해있기 때문이다.
그 옛날의 내가 느낀 감정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은 같은 맥락에서 오는 황당함 아니었을까? 세월이 흘러도, 가진 것이 생겨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유치하고 한심한 느낌, 인식, 인간, 세상... 코 없이 살아갈 수 없듯이 고통 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잃어버린 내 코를 찾아 헤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