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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Nov 07. 2024

금 간 꽃병

믿음은 금 간 꽃병

아교로 붙이고 이어도

실금 사이로 물이 다.

흘러나온 물방울이 눈물처럼

햇살에 지친 지붕 위의 눈처럼

쉴 새 없이 떨어진다.


나의 암흑 속에는 더 짙은 암흑이 있다.

떨어져 깨어져도 느끼지 못하는

無名 無實 無感의 어둠.

얼려놓은 믿음이 녹아내리듯

그 어둠마저 흘러내릴 때

꽃병은 소리 없이 부서진다.


불신의 조각들을 끌어 모아

새 꽃병을 만들어도

실처럼 가는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세월의 虛像.

무엇을 믿었던가.

무엇을 믿지 않았던가.


그림자만 밟고 살아온 세월

자국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어둠 속에 지워진 실체의 진공(眞空).

주지도 받지도 못한 믿음의 파편을

고스란히 온몸에 박아 넣고

빈 몸조차 무거워 흔들리고 있다.


삶은 깨어진 믿음

다시 메우지도 잇지도 못할

호흡, 맥박, 검은 피의 응고.

얽힌 실타래 풀어내듯

인(因)과 연(緣)이 엮어낸 날들이

금 간 꽃병처럼 망연(茫然)하다.


무엇을 믿었던가.

무엇을 믿지 않았던가.

갈 길은 멀기만 한데

저녁 해는 왜 이리 짧을까.

잊힌다는 것, 남겨진다는 것

금 간 꽃병에 담긴 시든 가화(假花)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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