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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Feb 05. 2023

그래도 오늘만 같다면

코트 주머니에서 힘겹게 한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든 찰나, 앞에 앉은 행인 세 명의 눈과 동시에 마주쳤다. 그들은 마치 한 몸처럼 손으로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방향을 따라가 보니 익숙한 붉은색 신용카드가 지하철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감사합니다."


차가운 바닥에서 혼자 서러웠을 카드를 재빠르게 회수해 오며, 소리와 함께 가벼운 목례를 그들에게 건넸다. 생면부지 타인의 불행을 결코 가벼이 보지 않고 선뜻 호의를 건넨 K오지랖에 새삼 국뽕이 차오른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나는 종종 교통카드를 잃어버리곤 했는데, 음 아마도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타려던 지난여름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버스에 올라타고 출발과 함께 앞문이 꽉 닫힌 후에야 나는 주머니와 가방 어느 곳에서도 카드가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당황스럽게 알아차리고 말았다.


"저.. 기사님, 다음 정류장에서 내릴게요. 카드를 잃어버린 거 같아요..."


무임승차의 비양심적 의도 따위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음을 어필하는 비언어적 표현들의 최대치와 함께 나는 기사에게 하차 의사를 조심스레 알렸다. 하지만 돌아온 건 '아이고, 여기서 내려서 어떻게 가려고요.'라는 츤데레 재질의 답변뿐. 나는 내리지 못했다. 20여분 간 기사님의 배려로 대가 없는 무료 버스를 타고 오며 나는 20여 년 전 버스에서 있었던 어떤 일을 떠올리게 됐다.


그날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학생들이 우르르 한꺼번에 몰려 버스를 타면 그중 버스표를 내지 않는 약은 아이들이 몇몇 있기 마련이다. 눈치 빠른 기사님은 아이들을 그런 얕은꾀를 호되게 혼내시곤 했는데, 하필 그날 범인으로 지목을 당한 건 나였다. 무척 억울했지만 그 복잡한 상황 속에서 달리 내가 아니라는 증명을 해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사의 꾸중과 밀도 높은 인파에 숨이 턱턱 막혀가며 벌게진 얼굴 그대로 눈물을 참고 집에 도착해야만 했던 그날의 기억.


희미하게 남아있던 기억 위로 꽃이 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승객들이 모두 내리고 네모난 공간 안에는 그와 나 둘 뿐. 반가운 마지막 정류장에서 벨을 누르고, 여느 때보다 좀 더 큰 소리로, '감사합니다 기사님'을 외치고, 조금은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오래전 배인 무안하고 부끄러웠던 감정들은 이날의 퇴근길 위에 조금씩 흘려보내져,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일이 된 것만 같았다.


나이스! 오늘은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버스가 왔다. 다행히 잠시 이별했던 카드도 주머니 안에서 얌전하다. 주고 돌아서는 타인의 친절은 손 위의 작은 난로처럼 살며시 마음을 위로한다. 그래서 12월에도 세상은 따뜻하고, 아직 살만 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겠지. 나이와 꼼꼼함이 나에겐 꼭 반비례인 듯 하지만 앞으로는 좀 더 챙겨보려 노력해야겠다. 그래도 오늘만 같다면, 이렇게 가끔 잃어버리는 것도 꼭 나쁜 일만은 아닌 듯하다.



202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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