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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Feb 09. 2023

사랑에 관한 짧은 정의

그해 여름, 회사 앞까지 찾아왔던 그놈은 꽤나 진지했다. 그날 난 나름의 작은 승리에 도취되어서 겸사겸사 축배의 맘으로 가볍게 저녁이나 할 생각이었지만 마주앉은 테이블에서 그놈은 뜬금없이 고백 공격을 했다. 아 물론 그 고백의 클리셰가 누구나 예상하는 것처럼 ‘좋아한다’는 아니었지만. 그놈은 자신에게 남들이 눈치 못 챌 어떤 장애가 있다고 했다. 그제야 그의 한쪽 눈을 다시 자세히 보았다. 유난히 항상 충혈돼 있다고 생각한 이유가 그래서였군, 이라고 생각하며 나의 짧은 동공지진이 부디 들키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래서 뭐, 그게 어때서라고 생각했다. 됐다고 했는데 녀석은 굳이 식사비를 결제했다. 후식을 먹었던가..? 그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놈은 삼각지까지 조금 걷자고 했다. 7월의 여름밤이어서 걷기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이태원을 채 벗어나기 전 대왕 바퀴벌레 한 마리가 위용있는 몸짓으로 두 사람 앞을 빠르게 가로질러간다. ㅅㅂ.. 그게 우리 관계의 어둔 징조였다는 걸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걸으면서 그놈은 꽤나 진지하고 남자인 척을 했다. (어린 주제에). 그리고는 어느 맥락쯤에서 내게 이렇게 물었다. 유미 , 유미 씨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아.. 음.. 아..



젠장. 난 품격 있고 지적인 독서모임장이고 싶은데, 나이도 서른넷이나 됐는데. 이런 뻔한 질문에 그럴싸한 대답을 못하다니 뭔가 분했다. 옆에서 그놈이 뭐라고 쫑알대는 건 들리지도 않았다. 의식이 분열돼서 물리적 세계 안에선 그놈과 대화를, 비물리적 세계에선 사만다처럼 사랑의 정의에 관한 서칭을 계속하고 있었다.


다섯 손가락을 다 써도 몇 개는 남을 과거의 연인들을 생각해 본다. 불쌍하고 처절했던 짝사랑도 떠올려본다. 영화와 드라마와 책에서 엿보있던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그래도 답은 찾지 못했다. 내 짧은 사랑에선 사랑에 관한 정의를 생각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고 작품 속 사랑의 정의는 마치 남의 채취가 밴 옷을 입는 것 같다. 그리고 그놈의 저주는 바로 그날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놈과 헤어진 그날 그 길에도, 폭우 같았던 섬머플링이 끝난 날에도, 그 해가 끝나고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또 헤어질 때마다 늘 그놈의 질문이 지독하게 나를 따라다녔다는 거다.


여하튼 그놈은 그 해 여름 나를 꽤나 힘들게 했다. 어찌나 마음을 아프게 하던지 그해 한강 아리수의 상당 부분은 내 눈물이 기여했으리라는 게 학계의 정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 녀석과의 인연을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절대로 아니라고 대답할 거다. 나 스스로 사랑에 대한 정의를 생각해 보게 만든, 그날 그놈이 내게 던진 그 질문 때문이다.


미안하게도, 그날 너에게는 의미 있는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어쩌면 사랑할 준비도 받을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제 서른 후반이 돼서 에이, 결혼은 포기했어요,라고 말하고 다니는 나이긴 하지만. 혹시라도 뜻밖의 인연이 나타난다면 또 그래서 누군가가 너와 비슷한 질문을 한다면 이제 난 꽤 그럴듯하면서도 나다우면서도 내 진심을 담은 사랑의 정의를 들려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날 이후, 아주 오랫동안 고민하고 또 생각해 본 덕분이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짧았던 그해 여름, 내게 머물러줘서 고마웠다고.



사랑은,

서로라는 책을 읽는 거예요.

다 읽었다는 착각이 들 때는 다시  

첫 페이지를 펼쳐보기도 하는 거예요.

말이 된 생각과 말이 되지 못한 감정 사이에

나만이 알 수 있는 당신의 언어를 읽는 거예요.

그렇게 끊임없이, 끊임없이 읽는 거예요.

끊임없이 서로를 읽는 거예요.

서로를.



20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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