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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Mar 01. 2023

수많은 당신들

집으로 오는 길엔 감정에 쥐가 났다. 슬프거나 우울해서가 아니라 종일 매여있던 긴장에서 나오며 벌어지는 일이다. 내게 촬영은 그런 일이다. 크거나 작거나. 여럿이 하거나 홀로 해도 마찬가지. 13년을 해오면서도 늘 무뎌지지 않는다. 촬영땐 밥을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러니 일이 끝나고 나면 허기지게 지치고 만다. 오늘도 촬영 끝에 때를 한참 지나서 밥을 먹었다. 뼈해장국을 시켜 놓고는 고기는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밥만 대충 욱여넣고 나왔다. 원래 엄청 좋아하는 음식인데도 입안이 텁텁했다. 촬영은 잘 됐는데도 입맛은 결과와 상관이 없었나 보다. 집으로 오는 길엔 집으로 가고 싶지가 않았다. 집으로 오는 길엔 허기가 졌다. C 식당에 가니 혼자라서 안된다는 말을 길게 돌려 말했다. 알아듣고는, 바로 건너편에 무난한 동네 식당에 들어갔다. 허기를 좀 채우고 나서는 가보고 싶던 을지로 바를 찾아 걸었다. 걷다 보니 동역사에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곳이었다. 간단하게 칵테일만 한 잔 하고 오려는 심산이었는데 들어가자마자 음악이 너무 좋은 공간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음악이 좋은 공간이었다. 이곳은 오래전에 스쳐 지나가며 기억해 두었던 곳이다. 빨간 네온사인이 인상적이어서, 언젠가 꼭 와보리라 생각했던 곳이었다. 공간을 찾아다닌다. 모든 공간은 하나의 작은 세계다. 공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작은 세계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공간은 공간과 이어져 있다. 세계는 세계와 연결돼 있다. 내가 그와 그녀와 당신과 우리가 되듯이 작은 세계들은 나름의 우주를 이루어 빛을 낸다. 세상은 수없이 많은 별들로 반짝이고, 알 수 없고, 닿을 수도 없어서 아름답다. 세상은 미지로 남아 슬프고 아름답다. 나에게 세계를 남겨준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수많은 당신들. 하필 슬프게 나를 떠났던 수많은 당신들을. 오늘은 이토록 당신들이 그리워지는 날이다. 우리가 함께였던 시간들. 그 흔적은 선명한 내가 되어, 이제 이토록 나를 사랑하게 된다.


2023.2.28.

M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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