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직은 지긋지긋

백수일기 25

by 미지

백수 22일 차. 수십 개의 이력서를 내고, 몇 번의 면접을 봤다. 그리고 몇 번의 과제를 했다. 어떤 지독한 회사는 과제에 실무 면접, 컬처핏 면접까지 하는 것도 모자라 레퍼런스 체크까지 진행한 후 처우 협의를 할 예정이라고 안내했다. 돈 주는 사람 마음이지 뭐. 수긍하려고 애를 쓰다가도 조금 지긋지긋²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긋지긋¹
1. [부사] 슬며시 거볍게 자꾸 힘을 주는 모양.
2. [부사] 계속하여 조용히 참고 견디는 모양.

지긋지긋²
1. [부사] 진저리가 나도록 몹시 싫고 괴로운 모양.
2. [부사] 몸에 소름이 끼치도록 몹시 잔인한 모양.


퍼플렉시티에게 30분 동안 과제를 내준 회사에 대해 캐묻다가 짜증이 나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는 고작 지원자인데. 무슨 C 레벨도 아니고, 팀장급도 아니고, 그냥 주니어와 시니어 사이 애매한 지원자일 뿐인데. 회사 내 시스템도 모르고, 매출 구조도 모르는데 무슨 전략을 짜 오라는 건가요. 구체적으로 무슨 전략을 짜라는 건지, 그거라도 말을 해 주셔야죠. 그러니까 무슨 전략! 뭐냐고! 자유라고만 말하지 말고 제대로 말을 하라고! 담당자에게 사자후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알라딘 중고서점에 책을 팔고 받은 현금을 챙겨 집을 나섰다. 코인 노래방에 가서 소리를 한 번 시원하게 질러야겠다.


현금을 탈탈 털어 1시간 20분 동안 소리를 지르고 집에 돌아와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키보드를 대충 건드리자 퍼플렉시티 대화 내용과 새하얀 파워포인트 화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큰일이다. 여전히 아무 생각이 없다.


그래도
해야지
어떡해


이력서. 자기소개서. 포트폴리오. 두 번의 면접. 이 정도로 지원자를 다 판단하기 어렵다는 건 안다. 사전 과제나 레퍼런스 체크가 필요한 이유도 알겠다. 하지만 이렇게 복잡한 채용 과정을 진행할 거면 최소한 연봉 테이블이나 협의 가능한 처우에 대해 먼저 알려주면 좋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과제비라도 주세요. 이걸 다 하고 처우 협의에서 만족스럽지 못할 때, 그때 입사를 포기하는 건 서로에게 자원 낭비 아닌가요?


몇 개월 전이었던가. 막 새 회사에 이직한 친구와 이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는 사전 과제와 레퍼런스 체크를 진행하는 회사를 한껏 비웃었는데, 그러면서 채용 전형이 지나치게 복잡한 회사는 사람을 잘 뽑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 말이 괜히 떠올랐다.


사전 과제를 준 회사 중 과제비를 주겠다고 말한 곳은 딱 한 군데였다. 그리고 그 회사만이 유일하게 과제를 주기 전 희망 연봉을 맞춰줄 수 있다고 말했다. 며칠 전, 과제비도 주지 않으면서 사전 과제와 세 번의 면접을 진행하겠다는 회사와 1차 면접을 봤다. 면접 10분이 흘렀을 때였다. 면접관은 이렇게 말했다. "과제하신 거 제대로 못 보긴 했는데 한 번 설명 좀 해 주세요."


이력서를 내거나 면접을 보는 일은 그렇게 힘들지 않다. 탈락도 괜찮다. 못 견디는 순간은 따로 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사전 과제를 했는데 그 누구도 관심이 없을 때, 실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면접관이 들어와 뭉툭하다 못해 쓸모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질문만 하며 한 시간씩 시간낭비를 할 때, 기껏 사람을 불러다 앉히고서 연봉을 깎아보겠다고 이력서부터 포트폴리오까지 열심히 트집을 잡으며 나를 후려칠 때….


이 모든 건 백수가 된 내가 견뎌야 할 일. 그래도 가끔은 구직하며 겪은 일을 모조리 구겨 쓰레기통에 처박고 기름을 콸콸 부어 활활 태워버리는 상상을 한다.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지만, 굳이 들을 필요가 없는 말도 많았다. 막말이 사람을 성장시키는 건 아니다.


그래도 어떡해 해야지. 새하얀 여백을 노려보며 쓰임을 알 수 없는 과제를 하는 수밖에. 백수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정체불명의 과제와 씨름하는 오늘은 모든 게 조금 지긋지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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