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흥적인 하루

백수일기 37

by 미지

약 한 달간 백수로 살아본 결과, 하루를 시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어난 직후에 이불을 정리하고 바로 씻는 것이다. 일단 씻고 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오늘은 가장 좋은 방법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상쾌하게 씻고 나니 왠지 모르게 밖으로 나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스팔트에 달걀을 깨 후라이가 되는지 한번 확인해 보고 싶을 정도로 더운 날이지만, 오늘 만큼은 너무 익숙한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다. 집순이에게 이런 외출 생각이 드는 날은 흔치 않다. 쪄 죽더라도 나가기로 결심했다.


가방에 양산과 손풍기를 챙기는데, 때마침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평양냉면 이야기를 하다가 말이 나온 김에 오늘 먹자는 결론이 나왔다. 외출 준비는 이미 끝났는데 약속 시간까지 두세 시간 정도가 남았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미뤄둔 일을 하나 해치우기로 했다. 새 의자 사기!


백수가 된 뒤로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기능이 없는 인테리어용 의자가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편함보다 귀찮음이 컸다. 의자를 바꾸려면 무엇을 살 지도 결정하고, 지금 의자에 폐기물 스티커를 부착해 버려야 한다. 생각만으로도 귀찮은 일이다. 그렇게 불편하지만 귀찮은 상태로 버티며 몇 주가 지나버렸다. 오늘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다짐으로 첫 번째 쇼룸으로 향했다.


첫 번째 쇼룸에는 사려고 생각했던 의자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버스를 환승해 다른 매장으로 향했다. 두 번째 매장은 무인 매장이었다. 에어컨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더운 매장 안에는 한 커플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앞에 찜해둔 의자가 있었다. 신나는 마음으로 앉았는데 사려고 했던 의자는 등판의 위치가 애매해 미묘하게 불편했다. 편해 보이는 외양을 한 의자 몇 개에 더 앉아봤지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살짝 김이 샜다.


매장을 나가려다가 구석에 숨겨진 듯한 애매한 색의 의자를 하나 발견했다. 별생각 없이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댔는데 등받이가 몸을 감싸는 느낌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바퀴도 달리지 않았고, 좌판에 제대로 된 쿠션도 없는 의자가 제일 편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다른 의자에 앉았다가 이 이상한 의자에 앉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매장을 나설 때 결국 썩 예쁘지도 않고, 사무용 같지도 않은 정체불명의 의자를 주문했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친구를 만나러 을지로로 향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유명한 평양냉면 가게의 대기가 빠지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먹은 불고기와 냉면은 아주 맛있었다. 친구는 연신 감탄했다.


배부르게 먹고 헤어진 뒤 곧장 지하철을 타지 않고 조금 걷기로 했다. 해가 질 무렵의 을지로.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길로 환승할 필요 없는 역까지 걸었다. 회색 건물들 사이로 오래된 갈색 벽돌 건물 하나가 오렌지색으로 빛났다. 여름마다 듣는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를 들으며 도시 속의 수많은 사람들을 구경하는 동안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즉흥적으로 의자를 사고, 친구와 평양냉면을 먹고, 가본 적 없는 길로 걸은 하루. 그저 드는 기분을 따라 산 하루를 마치고 다시 샤워를 하는 동안 조지 거슈윈의 말이 떠올랐다.


"삶은 재즈와 비슷하다. 즉흥적일 때 가장 좋다.

(Life is a lot like jazz. It's best when you improvise."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6화복권 긁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