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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벌띵 Nov 11. 2023

가을, 소풍 하자.

어느 주일, 예배를 드리고 돌아와 급히 도시락을 샀다. 가을 하늘이 푸르렀고 햇살도 따뜻한 날이었다.

경주와 포항 그 사이에 사는 우리 가족은 바다도 산도 천년 고도의 유적지도 차를 타고 30분이면 도달한다. 딸이 유치원생 일 적엔 바다로 산으로 허구한 날 다녔다. 초등 2, 3학년까지 여름이면 바다와 계곡, 봄가을이면 유적지를 누볐다. 그러다 코로나19가 시작되고 우린 여행을 멈췄다.


실로 오랜만에 준비하는 도시락이었다. 외식보다 집밥을 좋아하는 우리를 위해 솜씨를 발휘했다. 과일과 물도 넉넉히 챙겨 넣고 길을 나섰다.

경주에 산다는 건 축복 같은 일이다.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여러 규제로 묶어 놓은 덕에 문화재뿐만 아니라 자연도 잘 보존되어 있다. 그중 하나가 황성공원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버지 손을 잡고 처음 가보았던 사십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무엇이 있다. 경주에 살아도 스쳐 지나기 일쑤인 공원에서 가을 소풍을 하기로 했다.


가을 숲은 시원하고 따뜻하고 한가롭고 적당히 붐볐다. 예닐곱 살 아들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주는 아빠, 유모차를 끌며 산책하는 부부, 반려견을 데리고 뛰는 청년, 벤치에 앉아 담소 나누는 어르신들을 만났다. 천년을 지켜온 나무 사이에 어우러지고 녹아난 모습에 가슴이 부풀었다. 지켜낸 시간과 지켜야 할 시간이 공존했다.

이제 나만큼 자란 딸이 내 손을 잡고 걸었다. 제 또래와 달리 부모에게 살가운 열넷의 딸은 오랜만에 나온 소풍에 한껏 설렌 마음을 드러냈다. 황성 공원에 얽힌 추억과, 이 공간을 지켜내기 위해 선대가 치른 대가에 감사하는 마음을 나눴다.

청설모가 도토리를 모으느라 분주한 곳에 멀찍이 떨어져 자리 잡았다. 도토리를 얼마나 모았는지 입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청설모와 우리 사이에 부는 바람이 좋았다. 햇살도 적당했다.


숲에서 먹는 도시락은 꿀맛이었다. 서로 권하고 맛보는 가운데 공짜로 떨어진 애정이 깊어가는 시간이었다. 경주시가 세심하게 제공한 클래식 음악이 숲을 채워 마치 미슐랭 레스토랑에 온 기분마저 들었다. 청설모가 가까이 오면 가져간 감 한 조각을 내어줄까 싶을 만큼 마음이 넉넉해졌다. (모든 설치류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나로선 매우 큰 아량이다)

천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숲은, 꼬꼬마 적 나와 열네 살 딸을 연결시켰다. 부모님과 함께 보낸 장소에 부모가 된 내가 딸과 함께 한다는 건 설레고 뭉클했다. 엄마가 준비해 주셨던 도시락을 먹던 곳에서 내가 싼 도시락을 먹는다는 의미, 알 수 없는 감정이 물결쳤다. 딸아이도 설명하지 못할 감정이 솟구쳤는지 오래 숲을 바라보았다. 늘 덤덤한 남편도 깊은숨을 들이쉬며 한 바퀴 휘돌아보며 자주 오자 했다.


아름다운 숲이 오래도록 이어지길 바라며 부스러기를 꼼꼼히 챙겼다. 쓰레기라 할 만한 걸 들고 가지 않았지만 또 모를 일이었으니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자연이 내어 준, 선대가 지켜낸 이 공간이 다음 또 다음 세대에게도 이어지길 간절히 바랐다. 청설모가 분주한 가을이 끝없이 이어지길, 훗날 태어날 내 손주가 이곳에서 제 엄마와 우리를 추억하길 바라는 우리는 가을 소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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