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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벌띵 Dec 10. 2023

그리운 나의 할머니

제임스 딘을 닮은 20대 중반의 아버지는 당신을 추종하던 많은 여성들 중에 가장 순진하고 보드라운 엄마를 평생의 반려로 택했다. 소문난 부잣집 둘째 아들이었던 아버지의 구애를 받은 엄마는 청상과부의 귀한 막내딸이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험한 일 한번 시켜보지 않고 키운 막내딸을 달라고 찾아온, 동네에서 소문난 부잣집 아들을 마주하고 외할머니는 어떠셨을지 이제야 궁금하다. 혹자는 시집 잘 가는 거라, 속된 말로 땡잡았다며 할머니 마음을 들쑤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랬을 게 틀림없다.


아버지 없이 자란 막내딸을 시집보낼 집안이 하필이면 근방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부잣집이었으니 혼사를 준비하며 막막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당시 스물셋은 시집보내기 어리지도 많지도 않아 적당한 나이였고, 가난한 집에 시집가서 고생하는 것보다야 부잣집에서 귀한 대접받는 게 나을 거라 체념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래도 할머니는 아버지만큼은 마음에 쏙 들었다고 했다. 키도 인물도 남들보다 배는 잘난 사위가 인형처럼 예쁜 딸 곁에 서 있는 모습이 그림 같았다며 어렸던 내게 전하던 할머닌 소녀처럼 웃었다. 그 사위를 빼다 박듯 닮은 내가 그래서 더 어여쁘다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지금도 눈 감으면 생각난다.


동생들이 태어났을 때마다 머물렀던 외가에서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외할머니는

참 부지런한 분이었다.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새벽 4시가 조금 넘으면 잠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난 할머닌 가장 먼저 콩나물시루에 물을 한 바가지 붓는 걸로 하루를 열었다. 조르륵, 조르륵, 시루를 통과한 물이 흐르는 동안 할머닌 염원을 담은 듯 느릿한 손길로 콩나물을 쓰다듬곤 했다. 엄마가 그리운 설움을 삼키다 할머니 품에서 겨우 잠든 나는 할머니의 움직임에 벌떡 따라 일어나 곁을 지켰다.

"더 안 자고 벌써 인났나? 얼라는 많이 자야 키도 큰다, 더 자라." 콩나물을 쓸던 손을 내 어깨로 옮겨와 토닥이던 할머니는 새벽의 어슴푸레한 빛처럼 고요했다.

원래도 예민한 아이였던지라 할머니 없이 잠들 자신이 없어 새벽부터 그 꽁무니만 따라다녔다. 군불을 지피는 할머니를 도와 풍로를 돌리고 지푸라기를 모아 불속으로 집어던지는 재미에 푹 빠졌다.

아궁이를 상대로 불을 키웠다 줄였다 하는 동안 할머닌 뒷간에서 오래 끓인 돼지 밥을 한 바가지 퍼다 마당으로 향했다. 찬 바람이 들어갈까 짚과 못쓰는 이불로 꽁꽁 싸맨 그곳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끼 돼지 소리가 새 나왔다. 그 소리에 벌떡 일어난 나는 핑크빛 여린 살을 드러낸 새끼 돼지가 무척 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지독한 돼지 냄새가 호기심을 이겼다. 마당으로 곧장 통하는 부엌문을 삐죽이 열고 내다보지만 새끼 돼지 털끝도 보이지 않았다. 분주히 돼지우리를 오가는 할머니 치맛자락만 펄럭였다.


할머니의 부엌은 세상의 모든 따뜻함을 다 모아 놓은 듯했다. 부뚜막 한쪽에 앉아 있노라면 간밤에 엄마가 보고 싶어 막혔던 설움이 녹진녹진 녹아 가슴에 따뜻한 웅덩이를 만들었다. 밤새 가득 찼던 울음을 지우고 배시시 웃는 내 입에 할머닌 갓 지어 따뜻한 밥을 쏙 넣어 주었다. 할머니가 아침저녁으로 닦아 반들거리는 가마솥으로 지은 밥은 입 짧은 내 입맛에도 맞춤이었다.

엄마가 어릴 적 이야기,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드문드문 듣기도 했다. 동생이 둘이나 생겨 안쓰러워진 나를 할머닌 살뜰히 챙겼다. 몸조리를 제대로 하는지 마는지, 막내딸이 걱정됐을 마음을 한쪽에 미루고 할머닌 내 어깨를 쓰다듬곤 했다. 작고 투박한 할머니 손은 언제든 따뜻했다.


할머니의 작은 손이 움직이는 대로 보글보글 끓는 된장, 이리저리 뒤집어 구워낸 마른 김, 발갛게 익은 김치, 겨울이면 밥상을 채우던 밥 식혜, 노릇하게 구운 두부, 깨소금과 참기름을 듬뿍 넣어 반드레한 간장, 부풀어 오른 계란찜, 푸짐한 밥상이 차려졌다. 그릇에 담기기 전 할머니의 투박한 손으로 덜어낸 음식은 내 입을 먼저 채웠고, 그걸 받아먹는 나는 마냥 즐거웠다. 혼자서 오롯이 독차지한 할머니가 내어주는 걸 나만 먹는 기쁨이 넘치는 아침이었다.


겨울만 되면 유난히 외할머니가 그립다.

음력설 며칠 전 있는 외할아버지 제사도 겨울, 할머니 생신도 겨울이라 그런가 하다 할머니와 나만 아는 추억을 찾았다.


성내기도 기뻐하기도 더뎠던 할머니는 수묵으로 그린 그림처럼 농도가 옅은 분이었다. 귀찮을 법도 했을 텐데, 당신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다니는 손녀 입에 먹을 걸 넣어 주며 입꼬리가 올라가던 할머니는 누구보다 뜨겁게 내 안에 남았다. 잘난 사위를 닮아 당신 손녀들 중 가장 예쁘다며 나를 추켜 세워주던 할머니는 돌아가신 다음에도 내가 힘든 시기를 지날 때마다 꿈에 나를 찾았다. 그리고 "할매가 다 해주꾸나. 니는 걱정 말고 이자 뿌라." 내 등을 다독이곤 했다.


꿈에 할머니를 뵈지 못한 지도 오래다. 내가 잘 살고 있다는 뜻일 테다. 아무 일 없어도, 아무 어려움이 없어도, 한 번쯤 내 꿈에 나타나 "할매가 니 안이자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내 손을 잡아주었으면... 여전히 철이 덜든 손녀는 당신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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