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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벌띵 Feb 20. 2024

가지 많은 나무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심니더." 일년에 두 번, 30년 넘는 세월 동안 명절이면 아버지를 찾아오시는 아버지 후배의 한 마디가 묵직했다.



지난 여름 할머니 제삿 날 별 것 아닌 오해로 뒤집어진 집안은 난장판이 됐다. 조부모님의 제사가 엄마 몫이 된지 스물 다섯해 정도 되었을라나? 엄마의 그간 공로는 물거품보다 초라하게 사그라지고, 일흔 넘도록, 두 무릎을 인공 관절로 갈아끼우고서도 간신히 지켜준 당신들 부모 제사를 아버지와 삼촌들은 엄마를 향한 원망으로 없애버렸다. 정확히는 앗아가버렸다.

그러고서도 명절은 꼬박꼬박 찾아왔다. 지난 추석은 살얼음판 그 자체였다. 안절부절 못하는 엄마를 여행이라도 보낼까? 미친 척 하고 엄마랑 둘이 해외로 나가버릴까?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버지가 건강하셨더라면, 마음이 강한 분이었다면 강행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엄마없이 살 자신이 없다하신 아버지를 엄마도 나도 외면하기 어려워 우린 꾸역꾸역 명절을 참아냈다.


1월 언저리에 있는 증조모의 제사는 어영부영 넘어갔다. 한 다리가 천리길이라고 아버지도 어머니가 아닌 할머니는 쉬이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산너머 산이라고 그날을 넘겼더니 설이 찾아왔다. 설이 가까워질수록 엄마는 눈에 띠게 우울해지고 말라갔다. 당신도 모르는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엄마의 고민을 단번에 알아챘지만 모른 척 외면했다. 어차피 시간이 흘러야 해결될 문제다. 세월이 무디게 할 날을 기다려야 한다 여겼다.


시가도 명절을 지내지 않게 되었다. 코로나19를 통과하는 동안 여러 번 제사도 명절도 지내지 않아보니 조상 신이 존재하는지 마는지 결과치는 같다는 결론에 도달한 게다. 거기에 남편의 강경한 만류로 시가는 이제 굳이 명절을 챙기지 않는다. 그런데 친정은 여전히 아픈 이 앓듯 때만 되면 약도 없는 고통에 허우적 거렸다.


엄마는 명절 음식을 하는 대신 만두를 빚자 하셨다. 북한에서 온 피붙이가 있는 것도 아닌 우리집은 북한식 만두를 겨울마다 빚는다. 엄마의 특제 소스까지 들어가니 우리 가족의 겨울을 채우는 별미다. 마음도 고단할 엄마가 만두를 빚자 하신데엔 아버지를 향한 애틋함과 연민이 가득했다. 뜨끈한 만두를 먹으며 마음 안에 그득한 통증을 씻어 내리자 청하는 몸짓이었다.



아버지는 만두를 거부하셨다. 누구보다 엄마의 만두를 좋아하시는 양반이 '절대, 두번 다시 먹지 않겠다'선언까지 하시면서 말이다. 아버지의 선언은 엄마를 더욱 고달프고 애달프게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시니 노렸다고 할 밖에.


나는 엄마을 보듬었다. 아버지께 양보하느라 실컷 먹어 본 적 없는 만두였는데 잘됐다 했다. 양껏 배부르게 먹을 기회가 찾아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설핏 웃는 엄마 눈가에 촉촉한 물기가 아팠다.



할아버지 병간호를 시작으로 할머니 제사를 지낸 세월까지, 엄마는 40년간 김씨 집안을 위해 당신의 인생을 갈아넣었다. 그 노고에 대한 감사는 커녕 원망으로 끝난 지난 여름 이후 삼촌들은 고모와 합세해 고모의 세컨 하우스에서 제사와 명절을 지낸다 했다. 일년에 고작 세 번의 제사와 두 번의 명절이라 일축하며 엄마의 고된 생을 무시했던 내 피붙이들은 기어이 그리했다. 제사를 좀 줄여 달라고, 명절도 이젠 각자의 자손들과 오붓히 보내자 간청했던 엄마를 가뿐히 지려밟던 내 피붙이들은 잔인했다.  


삼촌이 셋, 고모가 하나. 그에 딸린 식속들은 숙모 셋, 고모부 그리고 열 명의 사촌들이다. 시집 장가간 사촌들이 낳은 아이들까지 하면 매 년 명절 우리 집을 북적이게 했던 수는 스무 명에 가깝다. 그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엄마는 부지런히 해댔다. 부잣집 둘째 며느리라는 타이틀만 있을 뿐 제산 한 푼 물려주지 않은 조부모 덕에 빛좋은 개살구였다.


그들은 우리 가족을 뺄셈으로 간단히 빼버렸다.


한 번 뺐으면 그만이지, 이번 설을 앞두고 기어이 고모와 막내 숙모는 엄마를 찾았다. 포장은 염려였고 내막은 도움요청이었다. 특히 막내 숙모는 대 놓고 힘들다 했다. 고모의 요청으로 시작된 명절과 제사는 고스란히 숙모들의 노동으로 돌아갔을테고 삼촌들은 고모의 청을 들어주는 척, 숙모들의 노고를 당연시 했을 게 틀림없었다.


그 소식은 엄마에게 전달되는 걸로 멈추지 않고 아버지께도 향했다. 동생들을 향한 연민이 마른 샘물처럼 솟아나는 아버지 마음에 어떤 감정이 움텃을지 보지 않아도,듣지 않아도 뻔했다. 누구라 특정하지 않은 원망과 미움이 만두에 와 닿았다는 걸 엄마도 나도 알았다.



"오는 추석에는 여행 보내드릴게요." 거실에 앉아 차를 마시던 나는 말했다.

"집에 있어봐야 속만 들끓고, 엄마 자식들이 십시일반해서 여행 보내드릴테니까 두 분이서 사이좋게 이곳저곳 다녀보세요."  내가 제안하자 엄마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그럴까? 그렇잖아도 네 아버지가 어디든 1박 2일 여행하자시던데 추석엔 여행이나 갈까?"

"그렇게 하세요. 낯선 곳에선 서로 더 보다듬고 이해하게 되잖아요. 우리 걱정이랑 마시고 여행 다녀오세요. 그리 알고 동생들과 의논해 볼게요."


엄마의 별미, 만두는 결국 엄마 자식들 입으로 쏙쏙 들어갔다. 아버지게 드셔보시라 권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아는 우리는 엄마라도 행복하길 바랐다. 속이 꽉꽉 들어찬 만두에 특재 소스를 얹어 한 입 가득 베어 물면 두 눈이 스르르 감기는 만두를 우린 양껏 먹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날 없다. 고소하고 담백한 맛을 자랑하며 입안 가득 터지는 만두를 먹으며 아버지 후배의 말을 다시 생각했다.

가지가 많아 바람이 잘 날 없는 게 맞을까?아니다. 여전히 가지로 남아 있는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뿌리에서 뻗어 나와 자란 시절은 결혼 전까지여야 한다. 결혼으로 일가를 이뤘다면 가지는 꺽여 다른 곳에 심기는 게 옳다. 꺾꽂이를 한 셈이다. 심겨진 곳에 뿌리를 내려 홀로 나무가 되어야 하는 게 맞다. 그걸 못해낸 아버지의 형제들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라 형체도 없는 뿌리에 기대어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꼴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식을 잘 키우려면 적당한 때에 제대로 꺾어 다른 땅에 심어야 한다. 여전히 내 가지에 두고 거기에서 열매 맺길 바란다면 내가 죽어 없는 세월에 자식은 형체도 없는 뿌리에 기대 애면글면할 밖에 도리가 없다.

칠순이 훌쩍 너머 다른 땅에 심기려니 얼마나 고단할까, 만두를 씹던 입에 눈물 맛이 났다. 꿀꺽, 짠 눈물과 삼킨 만두가 엄마같고 아버지 같아 내 맘이 더 짜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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