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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벌띵 May 17. 2024

네 속이 썩은 줄 내가 어찌 알았겠어?


 어린아이 얼굴에 핀 홍조처럼 발그레한 붉은색이 도는 사과를 골라 담았다. 윤기가 반드르하게 도는  코로 가져다 대고 향긋한 내음도 맡아가며 담는 사과는 아침이면 과일만 먹는 딸을 위한 것이었다. 누구도 아닌 자식 먹일 생각에 섬세함과 진지함을 더했다.

  지난해 병충해로 사과 작황이 좋지 않아 한 알에 2천 원을 훌쩍 넘긴 가격에 움찔한 것도 잠시, 군것질이라고는 하지 않고 하루 세끼 먹는 게 전부인 사춘기 딸을 생각하니 망설였던 마음이 옹졸하게 느껴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보리차를 먼저 끓인다. 연하게 볶은 보리는 색이 짙지 않아 은근하게 구수한 향만 남긴다. 가족에게 먹일 양을 보온병에 담아 두고 내 몫의 물을 차가운 물과 섞어 따뜻하게 마시는 걸로 하루가 시작된다. 물이 끓는 사이 미리 사둔 사과 한 알을 꺼내 뽀독뽀독, 잔류 농약 하나 남기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씻어낸다. 붉은빛이 도는 표면이 물에 젖어 반짝이는 걸로도 행복수치가 올라간다. 과도로 절반으로 뚝 자른다. 양끝 꼭지와 씨를 빼내고 접시에 담는다. 때로는 절반으로 잘라진 채로 때로는 먹기 좋은 크기로 분할해 담아낸 사과와 아몬드 일곱 알이 딸의 아침이다. 딸기, 키위, 토마토, 바나나, 그때그때 집에 있는 과일을 함께 곁들이기도 한다.


  사과를 자르다 보면 겉은 멀쩡한데 속이 썩은 게 간혹 있다. 씨가 있는 부분부터 썩기 시작한 걸 반 자르고서야 발견했을 때의 낭패감이란. 이걸 먹여야 하나 어쩌나 싶어 어정쩡한 자세로 한참 들여다보게 된다. 사악한 가격을 생각하면 먹는 게 맞고, 속부터 썩은 걸 보면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니 버리는 게 맞고, 일단 속을 도려내고 툭 잘라 맛을 본다. 향긋하고 달큼한 맛 끝에 쓴 맛이 묻어난다.




  얼마 전 수능 만점으로 유명 대학 의대에 입학한 걸로 유명세를 떨친 남성이 중학교 동창으로 만나 연인으로 발전한 또래 여성을 살해한 뉴스로 떠들썩했다.  


  나는 SOLO라는 예능 프로그램 남자 출연자는 여성의 학력을 중요시 여긴다고 했다. 좋은 학력을 가졌다는  그 사람이 얼마나 성실하게 삶을 살아왔느냐의 방증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게 그의 소견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 사람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까?

그 출연자의 말대로라면 수능 만점자 출신 살인자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고 보장된 인간이어야 한다. 고인이 된 여성도 그런 성실함과 단단함을 보고 연애를 시작했을 테고 사귀어 보니 그 안에 내재된, 정말 가까운 사람만 알 수 있는 불행의 싸인을 읽고 이별을 고하지 않았을까.


  겉만 보고 판단해야 하는 많은 것이 있다. 매일 먹는 식자재부터 가족으로 키우려 데려온 애완견 그리고 사람까지. 우리는 매일 수많은 상황에 놓이고 그 상황의 수만큼 선택을 해야 한다. 각자의 경험과 기준대로 최선의 것을 택하지만, 내가 심혈을 기울여 고른 한 알에 2,3천 원 하는 사과가 속부터 썩었듯 칼로 반을 뚝 자르고서야 최악의 선택이었다는 걸 깨닫는 일이 허다하다.

  

  지난해 딸과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수능 만점을 받고 미디어에 여러 번 노출된 학생에게 기자가 독서는 얼마나 했느냐 물었다. 질문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나는 학생이 다독가였으면 했고, 답은 완전 반대였다. 책을 좋아하지 않고 독서를 거의 하지 않았다는 답에  몹시 실망스러웠다.

  실망한 나와 달리 딸은 그간 엄마에게 강요받은 독서의 무용함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책을 읽지 않아도 수능을 잘 볼 수 있을뿐더러 만점 받는 일도 가능하지 않냐며 앞으로 독서보다는 학과 중심 공부에 매진하겠다는 결심을 드러냈다.


"네 말대로 독서를 안 해도 수능은 잘 볼 수 있겠지.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면 독서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야. 문제를 풀기 위해 지문을 읽는 것과 학문을 탐구하기 위해 두꺼운 서적을 읽고 파악하는 건 완전 다른 이야기일 텐데, 독서력이 없는 사람이 그걸 감당하긴 결코 쉽지 않을걸. 1학년은 그럭저럭 견디겠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한계에 부딪힐 거고 그 한계로 인해 인생의 첫 절망을 맛보게 될지도 모르지. 그동안 성공가도로만 걷던 사람이 고작 책 한 권을 제대로 읽고 해석하지 못해 마주할 절망은 크고 작은 시도와 실패를 겪은 우리가 느끼는 절망과는 다르겠지. 그때라도 정신 차리면 다행이고 그렇지 못하면 뒤늦은 사춘기가 시작될 게 뻔해. 그러니 얕은수를 부리려 말고 길고 넓은 안목으로 네 인생을 고민하길 바라. 수능 만점이 큰 성과인 건 분명하지만, 그걸로 얻는 혜택은 딱 대학 문턱 까지라는 걸 간과하지 말고."





 탐스러운 붉은색으로 반짝였지만 속부터 썩어 쓴 맛을 낸 사과는 결국 음식물 쓰레기통에 담겼다. 그 쓴 맛이 딸의 몸 안에 들어가 어떤 화학 작용을 할지 나로서는 알 수 없으니 안전을 선택했다.


사과든 사람이든, 불안 요소로 작용할 듯 보이면 과감한 선택을 해야 한다. 돈이 아까워서, 그간 함께 한 시간이 아쉬워서, 내가 아니면 저 사람이 어찌 될까 불안해서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일어날 일을 누구도 모른다. 연민과 아쉬움이 올라와도 돌아서는 용기와 판단이 필요한, 불안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간다. 싸함은 과학이란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란 생각, 오늘 아침 속이 썩어 쓴 맛이 나는 사과를 보고 다시금 깨닫는다.

 속부터 썩었다 할지라도 구원받을 방법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오늘이다.



사진 출처

<a href="https://kr.freepik.com/free-photo/red-apple-in-basket_4011181.htm">작가 lifeforstock 출처 Freepi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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