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벌띵 Jul 03. 2024

푸르른 평온

실로 오랜만에 새벽 4시 40분에 눈이 떠졌다. 전날 밤 들은 강의와 요즘 집중해 읽고 있는 습관 관련 책 때문이리라. 아침 시간에 대한 효율, 의미도 중요하지만 나에게 새벽에 일어나 무언가를 한다는 건 나의 무기력을 타파하는, 이순신 장군이 옆구리에 찬 장검과 같았다.



장마철이라 더욱 어슴푸레한 새벽이었는데도 알람도 없이 눈이 번쩍 떠졌다. 너무 쉽게 의식도 없이 깬 잠에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아직은 멍~한 정신을 깨우려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열고 줌에 접속했다. 그 새벽에, 나보다 더 이른 시간에 일어난 사람들이 모여 책을 읽고 있었다. 이런 부지런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의 새벽기상은 온 가족을 깨우는 알람이 되고 말았다. 거실에 널브러져 자고 있던 강아지가 서재로 향하는 나를 따라나서고, 그 시간에 절대 일어날 일없던 딸이 방문을 열고 나와 화장실로 향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집에서 가장 일찍 일어나던 남편이 그날은 꼴찌였다.



새벽 독서를 끝내고 반려견 ‘미남’이 산책을 위해 골목으로 나갔다. 전날 내린 비로 땅은 여전히 축축했고 옹이 진 곳에 고인 물웅덩이를 미남인 요령껏 피했다. 제가 누는 오줌에 네 발이 젖는 건 아랑곳 않는 녀석이 어쩌다 발가락 하나를 적시지도 않았을 빗물을 탈탈 털어내는 꼴이라니, 실소가 터졌다.


한동안 텅텅 비었을 새벽의 시골 도로는 매연의 ‘ㅁ’ 자도 없을 만큼 맑았다. 한 여름, 장마철, 비 갠 새벽. 이 세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졌을 때라야 맡을 수 있는 풀내음이 코끝에 밀려들었다. 한두 뿌리로는 낼 수 없는, 한 뭉치로도 불가능한, 온 들판을 채운 풀들의 향기가 폐를 다림질이라도 하듯 들어찼다. 우리가 사는 동네를 가르는 강의 물비린내도 쏟아진 비에 씻겨 내려간 터라 청명함만 감돌아 만족스러웠다.

온 가슴과 배를 부풀려 들이마시는 공기가 온몸을 빠르게 돌 때 내가 살아 숨 쉬는, 생명 가득한 존재라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꼬리를 한껏 치켜세우고 타닥타닥, 경쾌한 소리를 내며 걷던 미남이가 풀쩍풀쩍 뛰기 시작한 건 들이마신 한 줌 공기에 아련한 무언가가 어렴풋이 떠오를 때였다. 여름 방학, 새벽 산, 아버지.. 단편적이고 짧은 영상이 몇 개 휙휙 지나가 아련해지려는데 녀석이 산통 분위기를 깨버렸다.

평원을 가르며 뛰던 보더콜리의 DNA를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나는 화들짝 놀라 리드줄을 꽉 움켜쥐었다.

“야! 뛰지 마!! 난 준비 운동도 안 했단 말이야!!!”

바사삭 깨져버린 나의 푸르른 평온!!!

이미 귀를 뒤로 젖히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미남이에게 내 도가니 사정은 알 바가 아니었다. 이제 겨우 12개월 된 너와 싸워 뭣 하리. 허탈한 웃음을 뒤로하고 질질, 손목에 리드줄이 채워진 내가 미남이에게 산책당할 차례였다. 집에 돌아가면 빈속이고 뭣이고 글루코사민을 먼저 털어먹여야겠다 생각하며 폐가 찢어지게 달렸다. 푸르른 풀내음으로 채워진 아침이라 다행이었다.



<a href="https://pixabay.com/ko//?utm_source=link-attribution&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image&utm_content=7168204">Pixabay</a>로부터 입수된 <a href="https://pixabay.com/ko/users/ruslansikunov-11647343/?utm_source=link-attribution&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image&utm_content=7168204">Ruslan Sikunov</a>님의 이미지 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의 후회, 나의 자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