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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쩌기저비 Dec 14. 2021

명절엔 엄마도 내가 야속했을까?


매년 돌아오는 설이나 추석에 우리 가족은 명절 전날 큰어머니 댁에 가곤 했다. 큰어머니 댁에 가면 아빠의 24시간은 오로지 술이다. 점심을 먹으며 함께 곁들이는 반주로 시작해서 큰아버지, 작은아버지와 함께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기울이는 낮술, 저녁이면 각자의 생활 전선에서 잠시 떠나 고향으로 모인 친구들과 술. 이 술은 새벽 늦게까지 이어져 다음 날 친인척 손님들이 오시기 시작하면 다시 시작이다.



큰어머니 댁은 나에게 유원지였다. 명절마다 큰어머니 댁을 향할 때면 꼭 오랜만에 맘먹고 놀이공원에 가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그곳에서 즐길 신나는 모험에 설레며 잔뜩 기대감에 들떠 신이 났다. 그 곳에는 도시에서 볼 수 없는 농촌의 먹을거리와 볼거리, 어드벤처가 널려있었다. 사랑방 아궁이에 불을 때고 남은 숯에 손가락이 까매지도록 감자, 고구마를 구워 먹기, 마당에 묶여있는 누렁이를 한참이나 쓰다듬고 밥을 챙겨주기, 우물물에 살고 있는 물방개, 소금쟁이, 게아재비, 우렁이 잡아 채집통에 모으기, 뒷동산에 올라 사촌언니와 산딸기와 이름 모를 열매 따먹기, 심지어는 뒷산에 올라 땅속에 있는 칡뿌리를 캐 씹어먹기까지. 나에게는 온통 새롭고 즐거운 일들 투성인 이곳에서 정신을 못 차렸다. 명절 동안 아빠, 엄마의 시야를 벗어나 나만의 세상에 빠져있었다.



그런 아빠와 나와는 별개로 이곳에서 오로지 엄마만 우리 가족이 아닌 것만 같았다. 모두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술 한 잔을 걸치며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어른들의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내 귀를 부비던 시간. 엄마는 저녁부터 아빠에게 몇 번이고 다짐을 받곤 했다.


“술 좀 그만 먹어.”

“이게 마지막이야. 이제 술 없어.”

“내일 아침 10에는 출발해야 해.”

“내일 9시부터 차가 막힌데.”


어차피 집에 가서 뭐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잔소리를 한다고 아빠의 행동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냥 서로 편하게 큰어머니 댁에서 하룻밤 더 자는 게 뭐 어떻다고 저러나 생각했다. 아니 나도 더 놀고 가고 싶은데 자꾸 서둘러 이곳을 떠나려는 엄마가 야속했다.



나도 결혼을 하고 마흔이 다 되어가는 지금.

그곳은 엄마의 집이 아니라는 거. 엄마가 마음 놓고 편하게 있을 수 없는 장소라는 걸 안다.

멀다는 핑계로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 외할머니댁에 찾아가지 못하는 엄마는 아빠의 고향 집에 와서 전을 부치고, 손님들의 술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면서 어떤 기분이었을까. 엄마의 엄마가 보고 싶고 엄마의 집이 생각나고 그리운 마음을 어떻게 부여잡았을까.



엄마의 젊은 시절인 지금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가깝다는 핑계로 명절이면 친정에서 저녁 한 끼로 대신한다. 명절 전날 시가에서는 꼬박꼬박 하룻밤을 보내면서 친정에서는 저녁밥만 홀랑 먹고 오는 일이 반복되니 남편에게 서운한 마음이 왈칵 든다.



설이 다가온다.

명절 전날 하루 종일 부엌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 여러 친척들 사이에 끼어 컴컴한 방에 무거운 머리를 뉘었을 엄마가 떠오른다.





덧붙임.

며칠  김장을 위해 가족 모두 시댁 갔다. 새벽 5, 바깥의 인기척에 잠이  나는 무거운 몸을 쉽사리 일으키지 못하고 ‘ 분만 , 조금만  되뇌며 이부자리에 누워 있는다. 해가  뜨지 않아 어스름이 깔린  시간에 문지방 너머 거실에서 첫째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빠, 김장 언제 시작할 거야?”

“이제 잠바 입고 나가야지.”

“어? 지금 할 거야? 아직 엄마 안 일어났는데? 엄마 일어나야 되지? 내가 엄마 깨울까?”


이불속으로 갑자기 차가운 기운이 들이친다. 나도 모르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이에게 한 소리를 한다.


“어머~ 범근이 오늘 아주 새벽같이 일어나 엄마도 깨워주고 정. 말. 고. 맙. 네.”

.

.

.

.

엄마가 이런 기분이었구나...

미안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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