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쩌기저비 Dec 20. 2021

어머님 댁


어머님 댁은 2층 단독 주택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파트나 공동 주택에 거주하는 우리나라의 부동산 특성상 단독 주택이라 하면 사람들은 각자의 주택 로망을 펼친다. 초록빛의 싱그러운 잔디와 계절마다 색을 갈아입는 화려한 꽃들이 함께하는 앞마당을 자연스레 상상하는 것이 보통이다.

어머님 댁은 옛날 벽돌식으로 지어진 주택으로 1, 2층이 분리되어있다. 2층은 야외 계단으로만 통해 들어갈 수 있어 1층과 2층은 각각의 독립된 공간이다. 주택의 소유주인 집주인이 1층에 살고 있고, 어머님과 아버님은 2층에 세 들어 살고 계신다. 집주인은 컨테이너 제작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 회사는 집 앞마당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니까 집 앞마당이 컨테이너 제작 공장이라는 말이다. 컨테이너 공장에서 왔다 갔다 하기 편한 집을 공장 부지에 만든 건지, 집을 짓고 땅이 남아 회사를 차린 건지 알 수 없지만, 누가 봐도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사는 집이라 여겨지는 곳에 떡하니 컨테이너와 상관없는 사람이 사는 집이 놓여있다.



어머님 댁 거실 창문 앞에서 앞마당을 아니 컨테이너 공장을 내려다보면 보이는 풍경은 1년 365일 똑같다. 오른쪽에는 인부들이 용접을 하며 튀어 오르는 뜨거운 불꽃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띄고, 왼쪽으로는 스티로폼 단열재와 합판들, 이삼층으로 어지럽게 쌓여있는 컨테이너들이 꽉 차게 시선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사이를 지게차가 부산스럽게 옮겨 다니며 바쁜 척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소리도 만만치 않다. 마치 공포영화에서 귀신이 나올 법 한, 긴장을 주는 날카롭고 괴기한 느낌이 드는 쇠 자르는 소리와 탁! 탁! 탁! 탁! 탁! 불편하게 반복되는 타카 박는 소리, 마치 앞마당에 대인국에서 온 걸리버가 살고 있는 건가 하는 의심을 하게 만드는 쿵쾅거리는 울림소리들. 마당의 광경은 체험 삶의 현장, 컨테이너 작업 공장 속으로 편을 찍고 있는 야외 세트장이다.



2층 거실 홑겹의 얇은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집 안에서는 체험 삶의 현장의 또 다른 회차가 펼쳐진다. 이곳은 김치 공장의 촬영 현장이다.

결혼을 한 지 벌써 10여 년, 그동안 내가 한 번도 돈을 지불하고 먹지 않는 음식이 있다.

김. 치.

이곳은 매년 초겨울이 되면 거의 100포기가량의 배추를 가지고 김장을 하고, 봄이면 시시때때로 배추 겉절이, 깍두기에 여름이면 열무김치와 총각김치, 오이김치에 오이지. 그밖에 동치미, 부추김치, 파김치, 갓김치 등 각종 김치가 끝없이 나오는 공장이다.

김치 만들기의 시작. 무엇일까? 배추 절이기? 배추 씻기? 이 공장의 수준을 우습게 본 사람들의 짐작이 가소롭다. 김치 만들기의 시작은 밭 일구기다. 지난해 밭의 작물들에게 자신의 모두를 던져 주고 힘을 잃은 흙을 뒤집어 주고, 부서 주고, 이랑과 고랑을 만들어 다시 올해의 새로운 생명의 알들을 틔워 줄 흙을 준비하는 것. 이것이 먼 여정의 출발점이다.



어머님 댁 앞마당의 왼쪽으로 스티로폼과 큰 합판이 쌓여있는 작업 공간 뒤 편으로 작은 문이 있다. 그 문을 열면 그곳은 또 다른 차원의 공간이다. 도라에몽의 어디로든 문인 것 마냥 생뚱맞게 위치해 있는 컨테이너 공사장 구석의 작은 문을 열면 전혀 다른 새로운 곳이 눈앞에 나타난다. 생경한 모습에 문을 열어 고개를 내밀고 저 쪽을 두리번, 다시 고개를 넣어 이 쪽을 두리번 왔다 갔다 눈을 꿈벅여 보아도, 이 문은 정말 도라에몽의 주머니에서 나온 어디로든 문이다. 다만 어머님의 텃밭으로만 나를 데려다 줄 뿐이다.

아주 큰 밭은 아니지만 풍족한 밭이다. 이곳에서 나는 호박과 가지는 지금 내 냉장고에 그득그득, 덕분에 우리 집은 어제 오늘 내일, 아니 일주일 전부터 아마도 일주일 후에도 호박, 가지, 호박, 가지 반찬의 연속일 것이다. 봄에는 대여섯 종 쌈 채소들이 몇 봉지나 가득이고, 쪽파, 대파에 부추, 고추, 오이에 김치를 만들 배추와 열무, 양파, 마늘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아, 참외랑 개복숭아, 대추가 빠졌네. 올해는 특별히 수박도. 어떻게 이 작은 텃밭에서 이토록 많은 채소와 과일들이 쏟아져 나오는지 불가사의하다. 어머님께서 집 뒤 편에 가꾸시는 작은 텃밭 버스는 오늘도 만석이다.

또 한 가지 미스터리는 냉장고 채소의 자가증식 현상이다. 우리 집 냉장고에 쌓여있는 이 녀석들은 나도 모르게 자가 증식하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일주일 내내 배추 된장국, 배추 나물, 배추 겉절이, 배추전으로 그렇게 많은 배추를 소비함에도 불구하고 냉장고에 다시 배추가 채워져 있을 수가 없다. 어머님 텃밭과 우리 집 냉장고는 보이지 않는 4차원 공간 웜홀로 연결되어 있어 봄부터 가을까지 평택 텃밭에서 나는 채소들이 아산 냉장고로 차원 이동해 있다. 나는 철마다 끝도 없이 소비해야 하는 녀석들에 냉장고를 열며 행복하면서도 괴로운 고민을 한다.



어머님 댁. 몇 발자국 채 되지 않는 작은 공간에서 각기 다른 배경을 만들어 놓은 드라마 세트장과 같은 이곳.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오늘도 뜨거운 햇살을 피해 새벽같이 일어나 텃밭의 채소를 돌보고, 마당의 어지러운 컨테이너를 피해 불편한 다리로 2층 집 계단을 오른다. 한 가득 가져온 텃밭의 채소로 자식 손주들이 먹을 김치를 바지런히 만들고 있으리라.


식탁 위 가지 볶음과 호박전에 어머님의 집이 담겨있다.




작가의 이전글 글쓰기의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