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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해 Nov 07. 2023

철학의 맛, 제육쌈밥

옹기종기

오후 2시 20분. 8시에 아침을 먹었으니 6시간 넘게 공복인 상태다.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부랴부랴 밥집을 찾아 헤맸다. 서울 도심에 있는 시장 어귀를 어슬렁 거리고 있노라니 무적의 어머니들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자꾸만 채였다. 밀리고 밀리다가 들어선 샛길. 여긴 어디야 하고 두리번 거리니 안 쪽 구석에 밥집 하나가 보였다. 옳다쿠나. 찐 맛집의 냄새가 난다. 제육쌈밥 8,000원. 청국장 7,000원, 된장찌개 7,000원이라는 노오란 입간판이 나를 반겼다.


가게 안을 들어서자 구수한 청국장 냄새와 매콤 달달한 제육 냄새가 나를 감쌌다.


"혼자예요?


총 너 댓개의 테이블에는 반주를 하는 아저씨들이 무리지어 계셨다. 그 틈바구니 사이로 작고 약간 마른 아주머니 한 분이 말을 건넸다. 네라고 답한 나를 여기 앉으세요 하면서 아주머니가 어떤 아저씨에게 눈짓을 주자 아저씨가 친철하게 자리를 안내한다. 손님이 아니셨던가. 얼굴이 불그스름한게 한 잔 하신 것 같은데.


"제육쌈밥 하나 주세요."


청국장을 먹을까, 제육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야무지게 한 쌈 할 양으로 제육을 골랐다. 고기를 본래 좋아하지 않는데 든든하게 한 끼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야 나머지 빡빡한 일정도 무사히 치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는 것 없이 바쁜 그런 날이라 조금 지친 상태에다가 위장이 빈 채로 계속 있었더니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혼밥이 익숙한 나는 이어폰을 끼고 다 보지 못한 넷플릭스 드라마 하나를 켜 둔 상태로 밥을 기다렸다. 드라마는 나름 재미있었다. 디카프리오와 메릴스트립이 나오는 돈 룩 업이라는 미국 풍자 드라마. 원래 좋아하던 배우들이기도 하지만 내용도 시대에 어울리는 내용이라 그럭 저럭 집중하면서 봤다.


그 즈음 반가운 한 끼가 나왔다. 푸짐한 밑 반찬과 함께 고봉밥 한그릇을 보며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제육과 쌈은 더 푸짐했다. 이런 한 상을 받아 본 것이 얼마만인가 싶었다.


"먹고 모자르면 말씀하세요."


사람 좋게 말씀하시는 사장님에게 무장해제 되어버린 나는 헤벌쭉 웃으며 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곤 평생 몸 바쳐 일할 곳을 찾은 머슴마냥 감사합니다를 외치곤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너무 배가 고팠다. 돌이라도 맛있을 상태긴 했으나 배고픈 걸 차치하고서라도 이 집은 맛집이었다.


진하게 느껴지는 손 맛과 모든 음식에 적절하게 배인 간이 꿀맛이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는 그 적절한 맛에 밥 두 그릇은 그냥 삼킬 듯했다. 이것이 바로 시장 골목을 오래 지킨 장사의 비법인가 싶었다.


배가 너무 불렀지만 남기면 사장님에게도 음식에게도 실례인 것 같아 모든 그릇을 싹 비우고 (쌈도 한 번 더 리필해주셨다.) 부른 배 때문에 헉헉 거리며 잠시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손님들 대부분이 동네사람들이거나 시장 상인 같았다. 희끗한 연륜의 그들 사이에서 새까맣게 젊은 나는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버무러지지 않는 이방인으로 보일 법 했지만 왠지모르게 그 풍경 속에 잘 녹아들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 힘이 아니라 그들의 힘이었는데 아마도 분위기 때문이리라. 가게 안에 있는 사장님과 오래된 손님들은 나를 배척하지도 그렇다고 참견하지도 않았다. 그저 배고픈 이웃 한 명이 와서 맛있는 밥을 먹는구나 싶을 정도의 눈길만 보낼 뿐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이 가게는 음식의 간도 그렇고 사람들도 그렇고 참 중도를 잘 지키는 구나. 그게 참 어려운건데 대단한 연륜들이다 하며 내심 감탄했다.



"모퉁이 사장님이 줬어. 이번에 귤이 맛있대. 먹어보니 달더라."


여사장님과 어떤 손님이 까만 봉투를 바스락 거리며 주고 받았다. 이윽고 내 테이블 위에도 별 말 없이 자연스레 귤이 하나 놓여졌다. 으레 그랬던 것 마냥 나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작은 가게 안에서 너무 소란스럽지도 그렇다고 너무 조용하지도 않은 말소리가 끊임없이 오고갔다. 그 그 소리가 듣기 좋아서 넷플릭스를 끄고 귤을 까먹으며 잠시 가만히 앉아있었다. 도란 도란, 두런 두런, 시끌 시끌, 조용 조용, 웅성 웅성. 옹기종기.



언제부턴가 하루 하루가 극단적이었다.

때론 너무 과했고 때론 결핍으로 가득찼다.

일이 많을 땐 생각이 적고 생각이 많을 땐 일이 적었다.

둘 다 많을 땐 과부하였고 둘 다 없을 땐 영혼이 사라졌다.


적당히 소란스럽고 적당히 조용한 것.

적당히 친절하고 적당히 무관심한 것.

뭐든 적당한 게 좋은거다 라고 누군가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우연찮게 들린 밥집에서 오늘의 철학을 찾았다.

치우치지 않는 삶을 위한 영혼의 밥까지 잘 먹었다.


(하지만 제육쌈밥을 적당히 먹는 건 실패. 이 날은 점심식사로 모든 식사를 끝냈다.)



지금은 가격이 천원씩 올랐다.

사당/이수 옹기종기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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