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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의 힘 Oct 19. 2020

로마인 이야기 3권

저자 : 시오노 나나미, 옮긴이 : 김석희

포에니 전쟁이 로마의 승리로 끝난 기원전 130년 당시 지중해와 에게해 등의 주변국들의 영토와 로마의 영향력은 과히 괄목상대하게 급상승하게 되었다. 지도를 통해 확인해 보는 것이 더욱 분명할 것 같다.

"서양에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표현이 있는데, 기원전 2세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외손자인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에게 딱 들어 맞는 말이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아버지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은 기원전 187년 장인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변호하면서 유명해 진다.

아버지 그라쿠스는 기원전 182년 안찰관, 기원전 180년에 법무관으로 선출된 후 이듬해인 기원전 179년 에는 에스파냐 총독으로 파견된다. 그는 에스파냐에서 발생했던 소동을 잘 해결함으로써 기원전 177년 집정관으로 선출된다. 스키피오의 딸과 결혼 후 기원전 169년 재무관으로 선출된다. 이후 기원전 163년 두번째로 집정관으로 선출된 후 오리엔트 국가들의 내분을 정리하기 위해 시찰단 단장으로 오리엔트 지역을 두번이나 방문한다.

무난한 정치일생을 보낸 그는 기원전 153년 사망하게 되는데, 홀로 남은 아내 코르넬리아(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 는 주변으로 부터의 많은 재혼 권유를 뒤로하고 두 아들을 멋진 로마의 사내로 키우는데 전념한다.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듯 잘 자란 큰 아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137년 26세의 나이로 에스파냐 파견 군단의 회계 감사관으로 선임된다. 당시 로마군은 이전 포에니 전쟁 당시의 로마군이 아니었다. 에스파냐에서 봉기한 반란군들과의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길고 긴 전쟁 그리고 그 전쟁의 후반에서 거의 모든 전투에서 연전연승하며 승리에 도취했던 로마는 긴급한 현안인 전쟁의 문제들이 해결되자 오히려 정치적 혼란과 불필요한 자만감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우리네 인생과도 같이.


먼제 이러한 정치적 문제의 근본은 원로원의 권한과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 졌다는 것이었다. 원로원은 외교권, 인사권, 사법권, 재정권 그리고 실질적 군사권 마저도 모두 틀어쥐고 있었던 것이다. 집정관, 원로원, 민회 라는 로마의 세축 중 한 축이 너무 비대해져  권력의 견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빈부 격차의 문제는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어 있었다. 또한 로마군의 주축인 병역 의무 연령의 시민 인구수가 급격히 감소한 것이었다. 이러한 매우 심각하고도 중대한 사안들로 민중들이 힘들어 하고 있던 기원전 134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에 선출된다. 그는 임기가 시작도 되기도 전에 농지개혁법안을 제출한다. 농지에 대한 평등 이 아니라 공정성을 강조한 일명 "샘프로나우스 농지법"은 처음에는 원로원의 반대가 없었으나, 이후 무산자에게 농지 개발을 위한 보조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 원로원은 반대하게 된다. 원로원의 회유책에 넘어간 또다른 호민관이었던 옥타비아누스의 거부권 행사로 티베리우스의 농지개혁법은 발의 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찬성파와 반대파가 충돌하게 된다. 이후 그는 병역기간 단축 법안과 사법 개혁 법안을 제출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치뤄진 호민관 선출일에 반대파에 의해 피살되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지지자 300명도 함께 참혹한 최후를 맞게되는데 이 때가 기원전 133년 그의 나이 불과 30세 였다.


기원전 133년과 132년 에스파냐와 시칠리아에서 반란이 있긴했지만, 쉽게 제압한 상태라 로마의 평화와 풍요는 수년간 유지되었다.


기원전 133년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던 형의 뒤를 이어 기원전 124년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으로 당선된다.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형의 유업이었던 농지개혁을 위해 '3인 위원회'를 되살리는 일이었다.  그는 병역법을 개정하여 아무리 긴급한 사태라도 17세 이하는 징집에서 제외한다는 법안을 제출한다. 실업자 문제 해결을 위해 공공사업법을 제출하게되고, 식민법을 통해 속주 등에 로마 시민들을 이주시켜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했다. 또한 형이 하려했던 사법 개혁을 위해 배심원 개혁법도 제출하고, 속주법의 개정을 통해 기사계급을 배려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또한 민회에서도 1계급부터 무산계급 까지 전원이 동시에 투표를 시작하도록 선거제도를 개혁했다. 또한 시민권 개혁법안을 제출했는데, 당시에 시민권은 투표권과 항소권을 모두 갖는 로마시민권과 이 두 권한이 없는 라틴 시민권 그리고 이 두 시민권자 외의 이탈리아 인 으로 구분 되었다. 가이우스는 이러한 시민권의 차별화가 유지되는 한 그나 형이 하려했던 농지개혁을 포함한 로마의 개혁은 완성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원로원은 가이우스의 이러한 개혁법안이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 로마 정치 체제에 도전이라는 생각을 굳히고 가이우스가 호민관에 재선되기 위한 억측이라는 소문과 정치적 공세를 강화하게 된다.

무지한 대중은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일도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저질러진 일로 믿기를 좋아한다.

위와 같은 말을 한 영국의 정치 평론가의 말처럼 민중들은 가이우스의 충심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122년 가이우스는 호민관으로 선출되기는 하지만 그의 반대파였던 리비우스 드루수스 도 함께 호민관으로 선출된다. 그는 가이우스의 농지법에 흠결을 내기 위해 그라쿠스 농지법에서 금지하고 있던 임차 국유지 양도를 허용하는 법안을 제출하면서 그와 충돌하게 된다. 드루수스는 이외에도 가이우스가 제출한 많은 개혁법안을 무력화하는데 앞장선다. 기원전 121년 가이우스의 식민지법에 따라 카르타고의 옛터에 식민지 도시 건설에 관한 투표가 있던 날, 찬성파와 반대파가 심하게 충돌하게 되고 집정관은 원로원을 긴급 소집하고 마침내 재판없이도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원로원 최종 권고' 즉 '국가 비상사태 선언' 을 하게 된다. 이를 집행하면서 33세의 개혁 입법자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형이 죽임을 당할 때는 300여명의 지지자들이 죽게되지만 금번 가이우스의 지지자들은 재판없이 무려 3천명이 죽어 나가는 끔찍한 대학살로 이어지게 된다.

포에니 전쟁 후 로마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일으키려고 했던 개혁자들, 그러나 100년이라는 세월의 흐름과 그 속에서 변화하는 역사의 흐름을 그슬러 자신들의 신념만을 진리로 여기고 지키려했던 쇄국주의자들 바로 원로원 과의 전쟁에서 원로원이 승리함으로써 로마인을 정신적 쇄국주의자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개혁자들의 꿈이 무산되도록 역사는 저들을 저버리지 않고 70여년 후 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게 되는데 그 중심 인물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였다.




무참한 비극적 사건이 끝난 기원전 120년 부터 기원전 78년 까지 두사람의 지도력으로 인해 로마가 움직이게 되는데 그들이 바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카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이다.

로마의 남성은 일반적으로 세개의 이름을 갖는다. 개인이름(프라이노멘), 일족이름(노멘), 가문이름(코그노멘)

예를 들면 티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이렇게,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평민 출신이었기에 일족이름은 갖지 못한듯 한다. 기원전 119년, 그는 호민관에 취임한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기원전 115년 법무관으로 당선되는데,  이후 5년이 지난 뒤 유구르타 전쟁이 시작되고 아프리카로 파견된다. 유구르타의 왕이 자신의 정적이었던 누미디아 왕족 중 한명을 로마에서 암살하는데 그것이 빌미가 되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기원전 109년 집정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총지휘를 맡게 된다. 마리우스가 부장으로 참여한 전투에서 로마군은 승리하게 된다. 기원전 108년에 있었던 두번째 전투에서도 로마군은 승리한다. 사령관인 집정관은 패퇴하는 유구르타를 추격, 일망타진하는 방법 보다는 외교적으로 성과를 내고 싶어했다. 작전의 변경을 요구했으나 결국 무시되고 만다. 그는 아프리카를 떠난 기원전 107년 집정관에 선출된다. 마케도니아와 아프리카의 전황이 심상치 않았다. 로마군은 계속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집정관 마리우스는 정규군단 편성을 기존의 징병제에서 지원병제로 바꾼다. 이제 더 이상 군 복무는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가 아니게 되었다. 아직 아프리카에서 유구르타와의 전쟁이 한창이었던 기원전 106년 마리우스는 절대지휘권을 가진 집정관으로 선출된다. 마리우스의 전술로 유구르타의 주요 거점은 모두 로마의 수중에 들어왔고 그는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마침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보내게 되는데, 로마 역사의 전면에 술라의 이름이 오르게 되는 계기가 된다. 마리우스는 기원전 104년에 또다시 집정관에 오르게 된다.

아프리카는 평정했으나, 당시 로마는 북쪽 야만인들의 잦은 침략으로 골치가 아팠는데 연이은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집정관으로써 기존의 군사제체를 개혁한 마리우스는 그의 개혁 법안에 따라 편성된 군단을 이끌고 기원전 103년 알프스를 넘어 남프랑스로 들어간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전후의 비교는 아래 표를 보면 참고가 될 것이다.

갈리아(현재의 남프랑스)에 도착한 마리우스는 운하 공사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마리우스 운하이다. 기원전 102년 마리우스는 네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된다. 그해 30만의 게르만족이 남하하기 시작한다. 테우토니족은 서쪽에서, 킴브리족은 북쪽에서, 티그리니족은 동쪽에서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 오게 된다. 서쪽으로 내려오는 적은 마리우스가 북쪽의 적은 집정관 카툴루스가 막기로 했다. 수적으로 열세했던 마리우스는 적을 일단 통과 시킨 후 배후를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아쿠아이 섹스티아이 전투' 에서는 로마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반면 카툴루스의 군단은 적극적으로 적과 맞대응하는 전술을 사용하는 바람에 숫적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포강 남쪽으로 후퇴하게 된다. 기원전 101년 마리우스는 집정관으로 선출되자마자 카툴루스와 함께 포강을 건너 선제공격을 감행한다. 베르첼리 에서 있었던 캄브리족과의 전투에서 로마는 완승을 거두게 된다. 두 방향에서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티그리니 족은 회군을 결정하게 된다. 이 전쟁의 승리로 마리우스는 기원전 100년 여섯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된다.

전쟁은 끝났다. 그런데 마리우스에게는 더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바로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의 처리 문제였다. 그들은 모병이 아니라 지원병 즉 직업군인이었다. 이제 군단을 해체하면 퇴직금을 줘야한다. 그 뿐만 아니라 새 일자리를 얻을 때 까지 실업 수당도 줘야 한다. 재원 마련을 위해 그는 호민관 사투르니누스를 활용했다. 우선 곡물법을 개정하고 해외에 식민시를 건설하는 새로운 식민법도 제안했다. 그 식민법에는 식민시로 이주할 이주자의 우선순위를 마리우스의 병사들에게 준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또한 민회 결정 법안은 5일 이내에 원로원에서 인정하도록 하는 법안도 포함되었고 이를 거부하면 원로원 의석을 박탈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안은 원로원의 강한 반대에 부딪힌다. 마리우스가 고전하고 있을 때 법안을 제출한 호민관 사투르니누스는 살해 당한다. 원로원은 드디어 '원로원 최종 권고'를 의결한다. 지나치게 원리원칙 주의자였던 마리우스는 원로원 최종 권고를 집행하게 되고 자신의 지지 기반이었던 시민들을 폭도로 규정 진압하게 된다. 자신에게서 민심이 떠난 것을 안 마리우스는 기원전 99년 집정관 출마를 포기한다. 이후 8년 동안 로마는 겉으로는 평온 했으나 내부 적으로는 점점 곪아가고 있었다.실업자 문제, 무자산자의 증가, 빈부격차의 심화 등등...

기원전 91년 호민관 마르쿠스 니비우스 드루수스(그의 아버지는 가이우스의 개혁법안에 사사건건 반대법안을 제출했던  두루수스) 는 이탈리아의 모든 주민에게 당장 시민권을 부여하는 시민권 개혁법 을 제출한다. 민회는 찬반 양론을 두고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회의장을 빠져나오던 드루수스는 " 로마인은 언제나 나와 같은 인물을 가질 수 있을까" 라는 말을 남기고 살해 당한다.


기원전 91년 250년간 로마의 동맹자였던 로마 연합 가입국들이 로마를 향해 반기를 들었다. 이른바 " 동맹시 전쟁" 이다. 이 반란 전쟁에 참여한 동맹들은 아래의 지도를 참고하기 바란다.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서 일어난 반란이기는 하나 비교적 경제력이 약한 지방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이었다. 그들은 연합국의 이름을 이탈리아 라고 하고 수도를 코르피니움으로 정했다. 로마는 북부는 집정관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 남부는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 맡기로 했다. 전쟁의 양상은 초반에는 이탈리아가 후반에는 로마가 유리한 쪽으로 흘러갔다. 기원전 90년 집정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민회에 이탈리아가 칼을 거두는 조건으로 "율리유스 법" 즉 동맹국에게도 로마시민권 취득을 허용 하는 법 을 통과 시켜 줄것을 요구했다. 로마 민회는 집정관의 요청을 가결해 주었다. 이 법의 통과로 반란의 명분을 잃게 된 이탈리아는 기원전 89년 전쟁을 끝낸다.이 사건을 계기로 도시 국가 로마를 떠받쳐온 로마 연합은 해체되게 되고, 로마는 이제 도시 국가를 초월한 새로운 형태의 국가로 진입하게 되었다.


기원전 92년 폰토스 왕국의 미트라다테스 왕은 주변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기원전 89년 집정관에 당선된 술라는 오리엔트 지방으로 나가길 원했다. 그러나 마리우스의 방해 공작에 막혀 그 기회를 마리우스에게 빼앗기고 만다. 이 결정 과정에서 유혈 충돌이 발생하고 술라는 가까스로 목숨을 구해 자신의 군단으로 복귀한다. 술라는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로마에 입성한 후 정적들을 무차별 제거한다. 한편 민회의 결정이라도 원로원 승인없이는 시행되지 않는다는 법안을 통과 시킨다. 정적이 제거된 그 때 술라는 마침내 오리엔트 정복을 위해 그리스로 떠난다. 한편 로마에서는 또다른 집정관 이었던 킨나는 술라와의 약속을 깨고 기원전 87년 마리우스와 그의 일파에 대한 명예 회복과 술라가 패기한 술피키우스 법을 부활시키게 된다. 그러나 킨나의 법안은 또다른 집정관 옥타비아누스에 의행 거부 당하고 로마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나지만 킨나가 패배하고 도망가게 된다. 이 소식을 접한 마리우스가 자신의 군대를 데리고 킨나와 함께 로마로 입성한다. 옥타비아누스를 포함한 1천 명이 목숨을 잃게 된다. 또한 기원전 86년 민회는 킨나와 마리우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한다. 그러나 곧이어 마리우스가 사망하자 킨나의 독재가 시작된다.


그리스에 있던 술라는 기원전 86년 아테네를 함락 시킨다. 그리고 미트라다테스의 군대와 카이로네이아 평원에서 맞붙게 된다. 전투는 쉽게 로마군의 승리로 끝난다. 같은 해에 8만명의 폰투스 군대와 회전을 갖지만 승리는 또다시 로마군이 가지고 온다. 술라가 해군까지 확보하게 되자 미트라다테스는 강화 협약을 요청하게 된다. 로마에서는 술라의 군대를 제압하기 위해 군단을 보내게 되는데, 그리스로 건너온 이들 마저도 모두 술라의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소아시아를 제패한 술라는 이들 국가들에 대한 통치체체를 만들었는데, 주요 소아시아 삼국은 상호간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 소아시아 서해안의 질서 회복, 속주세 부활, 2개 로마군단과 해군을 소아시아에 주둔시킨다. 술라가 병사들에게 다시 로마로 돌아가겠다는 공언을 함으로써 킨나는 이를 제압하기 위해 군대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지만 그 과정에서 살해 당하고 만다. 기원전 84년의 일이다. 기원전 83년 아테네를 떠난 술라는 브린디시에 입성하게 된다. 술라를 반란군으로 지정하고 정부군과 술라 군과의 전쟁은 2년간 이어진다.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전쟁은 기원전 82년 11월 술라의 승리로 끝난다. 로마 입성 후 그는 자신을 반역자로 몰았던 모든 이들을 찾아내어 죽이게 된다. 그의 목적 중 하나는 민중파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절대 권력자가 된 술라는 민회를 통해 무제한 임기의 독재관이 되고자 했고, 결국 무제한 임기의 독재관에 오르게 된다. 기원전 81년 독재관 술라는 국정 개혁을 시작한다.시민권 및 선거제도, 복지문제,실업자 대책, 원로원 개혁(의석수 600으로 확대), 사법개혁(배심원은 원로원 의원으로 한정), 행정개혁, 속주 통치 체제 개혁, 군사 개혁, 지방 개혁(중앙정부에서 프라이펙투스 파견), 호민관 제도 무력화 등이다. 많은 부분이 과거의 것으로 회귀했다. 그런데, 임기 무제한의 독재관 술라는 기원전 80년 민회에서 자신의 독재관 자리를 자진해서 내려 놓는다. 58세의 최고 권력자는 정계에서 은퇴하게 되고 이후 1년이 지난 어느날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 진다.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가 저물고 이제 폼페이우스의 시대가 시작된다. 기원전 77년 서쪽 길리아 지방 총독이었던 레피두스는 자기가 제안한 법안이 부결되자 군사력을  사용하여 법안을 통과시키려 했다. 원로원은 즉각 '원로원 권고' 를 가결하고 군대를 보내게 된다. 정부군은 폼페이우스의 지휘 아래 쉽게 승리를 얻게 된다. 그러나 레피두스의 돌발 행동으로 에스파냐 지방에서의 로마의 군사력이 약화되었고 전투에서 패한 일부가 에스파냐 쪽으로 넘어갔다. 결국 군사력으로 그들을 제압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 국내외 상황은 좋지 않았다. 에스파냐에서는 세리토리우스 전쟁이 오리엔트 지방에서는 폰토스 왕국이 다시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29세의 나이로 집정관 대리라는 임시직책을 갖고 에스파냐로 가게 된다. 에스파냐로 넘어가는 도중에 그는 터널 공사를 하고 가도를 놓는 등의 제반 사업을 하면서 천천히 이동하게 된다. 마침내 기원전 75년 폼페이우스는 적과 첫번째 전투를 하게 된다. 그러나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는 적을 완전히 소탕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2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반군의 총사령관 세르토리우스가 부장에게 살해 당함으로써 세르토리우스 전쟁은 기원전 72년 끝나게 된다. 하나의 문제는 해결했으나 로마는 기원전 73년 노예들이 일으킨 '스파르타쿠스 반란' 으로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노예와 같은 위치였던 검투사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노예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없는 자라고 정의했다.

검투사와의 전쟁은 초반에는 로마군의 완패가 이어졌다. 집정관이 이끄는 로마 정규군과의 수차례 전투에서 검투사들은 계속 승수를 쌓았다. 고향을 향해 북으로 진군하던 그들이 갑자기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고 메시나 해협을 건너 시칠리아에서 정착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소망은 이루어지이 않았고 산악지대로 피해 다니다가 결국 로마군과의 마지막 일전에서 패하게 된다. 

기원전 72년 세르토리우스 전쟁의 승리자 중 메텔루스 피우스는 로마 국경에서 군대를 해산했으나 폼페이우스는 루비콘 강에 이르러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원로원에 3가지 통첩을 보내게 된다. 그의 요청 사항 중 어떤 것은 도저히 현행법으로 들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바로 그 때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승리로 끝낸 크라수스 마저 남쪽에서 자기 군단을 이끌고 북상하고 있었다. 위기를 느낀 원로원은 군대 해산을 조건으로 집정관에 출마할 수 있도록 했다. 기원전 71년 이 두사람은 나란히 집정관에 당선된다. 이 두사람은 다음관 같은 몇가지 법안을 동시에 제출하고 통과시킨다. 호민관의 권위와 권한의 완벽한 부활, 배심원 제도의 개혁(기사계급이 배심원 독점)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오리엔트 지역에는 로쿨루스가 지휘하는 로마 5개 군단이 있었다. 기원전 70년 폰토스 왕국은 아르메니아와 왕국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로쿨루스에게 압박을 가하려했다. 그러자 로마군은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갔다. 전투는 이번에도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그의 영향력은 카스피해 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장수로써 그의 능력은 인정 받았으나 자기 병사들에게 충성심을 얻을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령관을 자신의 부만 챙기는 파렴치한 사람으로 치부했다. 이러한 불신으로 로쿨루스의 지휘력은 상실되어져 가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기원전 66년 로마로 귀국하게 된다.

기원전 67년 폼페이우스의 구상에 따라 호민관 가비니우스 가 제안한 해적소탕작전은 마침내 지중해 재해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해적 소탕작전이 끝난 기원전 66년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3차 미트라다테스 전쟁을 시작한다. 첫번째 전투에서 로마에게 완패를 당한 폰투스 왕은 루쿨루스에게 사용한 전술을 구사한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오히려 폰투스가 동맹으로 공을 들이고 있는 파르티아와의 동맹을 제의한다. 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선택하게 되고 이는 아르메니아가 폰테스와 맺고 있는 동맹을 파기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궁지에 몰린 폰티아 왕국의 미트라다테스 는 폼페이우스에게 강화를 제의하게 된다. 폼페이우스는 또한 시리아로 진격하여 셀레루코스 왕조를 지워버린다. 자신의 동맹이 모두 로마로 돌아섰다는 것을 알게 된 미트라다테스는 자살하고 만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는 길고 길었던 오리엔트 지역의 평정을 이루어 냈다.

로마는 마침내 지중해를 내해로 삼는 최고의 패권 국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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