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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의 힘 Nov 09. 2020

로마인 이야기4(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정복자를 꼽으라면 몽골의 칭기스칸,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황제, 그리고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 아닐까. 그의 이름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달력의 한 중간 7월에 July 라고 오늘날까직도 불리우고 있다. 그의 일생을 두권에 나누어서 작가인 시오노 나나미는 소개하고 있다.

상권에서는 그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갈리아 전쟁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 대부분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록한 갈리아 전쟁기를 참고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처럼 그는 자신의 갈리아 정복과 관련하여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 장르가 다른 것은 이순신 장군은 일기 형식으로 누구에게 보이거나 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기엔 힘들지만, 카이사르의 그것은 자신의 치적을 길이 남기기 위한 자서전적 기록이라 하겠다.


태어난 곳

그가 태어난 곳은 로마의 "수부라 지구"이며 포로로마노와 잇닿은 곳이다. 그가 37세에 최고제사장으로 뽑혀 관저로 들어가기 까지 그는 이곳에서 살았다. 율리우스의 집안은 오랜 전통의 명문이긴 하지만, 그 세력이 한풀 꺽인 귀족이었다.기원전 100년 7월 12일이 그의 탄생일이다. 위로 누나, 아래로 여동생이 있었고, 자녀들에게 매우 헌신적인 현명한 어미니 밑에서 자랐다.


소년시절 (기원전 93년~기원전 84년)

어머니 아우렐리아는 학자 집안으로 유명한 아우렐리우스 코타 가문의 여인으로 교양있는 여성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6,7 세부터 여느 로마 귀족 가문의 자제처럼 교육이 시작되었다. 8,9세부터 16세까지 고등교육을 받는다. 오전엔 교양과 철학 수사학 등을 배우고 오후엔 체육활동을 통해 체력 훈련을 한다. 그의 소년 시절에 동맹시 반란이나 술라의 쿠테타와 마리우스의 로마 점령과 정적 제거 등의 사건이 있었고, 17세에는 결혼을 하게 된다. 그의 아내는 칸나의 딸이었다.


청년시절(기원전 83년~기원전70년)

이 시절 로마의 최고권력자는 술라였다. 기원전 82년 내전을 종식시킨 술라는 반대파 가문의 카이사르에게 부인이었던 칸나의 딸과의 이혼을 명령한다. 그러나 18세의 카이사르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역사가가들은 이런 카이사르의 태도에 대해

카이사르는 젊은 시절부터 배짱이 대단했고, 이를 통해 자신이 민중을 대신할 수 있는 지도자의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정치적 결단과 야심가였다

라고 평가한다. 최고권력자에 반기를 든 그는 목숨을 지키기 위해 소아시아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망명 중 19세의 카이사르는 아시아 속주 총독인 미누키우스의 군단에 입대한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었던 카이사르가 치른 최초의 전투는 레스보노 공방전이었다. 기원전 78년 킬리키아에 있던 20살의 카이사르는 술라의 임종 소식을 듣고 다시 로마로 돌아온다.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23 세에 변호사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변호사업에서 참담한 실패를 하고 공부를 위해 24살 때 로도스 섬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이 때 30세의 폼페이우스는 로마군 총사령관으로 4개 군단을 이끄로 에스파냐로 떠난다. 기원전 74년 로도스 섬에 있던 그는 외삼촌인 아우렐리우스 코타가 비티니아 지방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그에게로 건너갔다. 그러나 외삼촌인 코타는 전투에 패하면서 비티니아에서 철수하게 되고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온다. 27세가 된 카이사르는 종신 직책인 제사장에 임명된다. 그리고 군단의 고위 장교인 600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대대장의 관직을 받게 된다. 그러나 28세~29세 까지는 전선에 나가지 않고 로마에 머문다. 기원전 70년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집정관에 선출되고 기원전 69년에 카이사르는 회계감사관에 선출되었다. 그의 근무지는 먼 에스파냐 라고 불리는 이베리아 반도 남부였다. 이제 30세가 된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매우 유명한 인물이 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는 화려한 생활방식과 막대한 부채 때문이었다.


장년시절(기원전 69년~기원전 61년)

카이사르가 빚을 많이 지게된 이유는 자기자신을 위한 엄청난 소비와 투자, 친구들에게 아낌없이 돈을 쓴 점, 끝으로는 많은 애인들에게 주는 선물 덕분이었다.

먼 에스파냐에서 근무하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대표를 자칭하는 사건을 스스로 만드는데 고모의 유해 앞에서 읽었던 추모연설이 그것이었다. 술라에게 제거되었던 민중파의 영웅이었으며 자신의 고모부였던 마리우스를 영웅으로 치켜세운 것이었다. 같은 무렵 아내였던 코르넬리아가 죽는다. 한편 기원전 67년 폼페이우스는 지중해내 해적을 완전히 소탕하면서 지중해의 팍스로마나를 성취한다. 35세가 된 카이사르는 비로소 안찰관에 취임하게 된다. 그의 안찰관 취임은 그리 화려한 경력은 되지 못했다. 안찰관이 된 그는 민중들이 좋아할 만한 도로보수나 검투사 시합을 개최하여 인기를 얻게 되고 마침내 민중들의 희망으로 떠오르게 된다. 기원전 63년 그가 37세가 되던 해 부터 카이사르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 해 종신직인 최고제사장에 선출된다. 그해 술라의 최측근이었던 카틸리나가 두번의 집정관 출마에도 불구하고 낙선한 것에 반감을 품고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키는데, 그 배후의 인물로 크라수스 라는 대부호와 카이사르가 지목받게 된다. 그러나 이 역모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키케로에 의해 카탈리나는 추방되게 된다. 역모 가담자 처리 문제를 놓고 원로원에서 토론이 있었다. 키케로가 주도한 이 토론회에서 사형이 당연하다는 쪽과 사형은 너무 과하다는 반대파 가 부딪혔다. 37 세의 법무관 카이사르는 반대파에 서서 원로원에서의 최초의 연설을 한다.

의원 여러분, 나는 모든 형벌은 당사자가 저지른 죄에 비해 조금은 가벼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연설로 원로원의 분위기가 바뀌긴 했지만 결국 사형 찬성파에 의해 사형은 집행되고 그는 뭇매를 맞게 된다. 기원전 62년 원로원 장로였던 카툴루스의 태업에 대해 카이사르는 그를 해임하고 폼페이우스로 대신하자고 주장하게 된다. 클라디우스 라는 귀족이 카이사르의 두번째 부인이었던 폼페이아를 짝사랑하여 여신제를 드리고 있는 여인들 사이로 여자로 변장하여 숨어드는 사건이 있었고, 그는 그의 아내와 이혼하게 된다. 39세가 된 카이사르는 마침내 회계감사관의 자격으로 먼 에스파냐로 떠나게 된다.


중년시절(기원전 60년~기원전 49년 1월)

오리엔트와 지중해를 정복한 폼페이우는 기원전 62년 귀국하게 된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60년 로마로 돌아온다. 카이사르의 정치적 행보는 늘 "원로원 타도"라는 목적에 닿아 있었다. 원로원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그가 집정관에 오르는 것을 지속적으로 방해하게 된다. 그도 폼페이우스와 마찬가지로 개선삭과 집정관 출마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 받았고, 그는 개선식을 포기한다. 그는 원로원을 견제하기 위해 기원전 60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시작하게 되고 마침내 기원전 59년 집정관에 오르게 된다. 집정관에 오른 그는 "악타 디우르나"라 하는 원로원 일보를 신설하여 원로원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회의나 내용을 시민들에게 전달한다. 또한 "율리우스 판례법"이라 칭하는 공직자 윤리법도 제출한다. 또한 그라쿠스 형제가 발의한 농지법을 보완하여 "율리우스 농지법"을 제출한다. 그러나 원로원의 심한 반대에 부딪혀 좌초되기 직전 삼두 중 한명인 폼페이우스의 힘을 빌어 농지법을 통과 시킨다. 속주 총독으로 떠날 것을 대비해 호민관 바티니우스를 통해 "카이사르의 속주 통치권에 관한 바티니우스 법"을 통과 시킨다. 이 법은 이탈리아 북부, 일리리아 및 프랑스 남부 통합 총독/ 임기는 5년/ 군사력은 총 4개 군단/막료 전원의 임명권이 그 골자이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 전쟁을 시작할 당시의 갈리아 지방은 아래 지도와 같았다.


갈리아 전쟁 1년째(기원전 58년)

임지로 떠나는 카이사르는 조용히 로마를 나서기 전에 어머니에 대해 남달리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외로운 어머니를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 한다. 갈리아 임지에 도착한 그는 카이사르 최정예 부대인 10군단을 포함하여 4개 군단을 소집한 후 헬베티족과의 전투에서 그들을 제압한다. 갈리아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게르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그는 게르만의 아리오비스투스가 이끄는 기병 주력부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갈리아 전쟁 1년 째에 두번의 승리를 얻게 된다. 갈리아 전쟁 첫 해의 카이사르 군단의 행로는 아래와 같다.

갈리아 전쟁 2년째(기원전 57년)

기원전 58년과 57년 겨울동안 프로빈키아 속주에 머물고 있던 카이사르에게 벨기에 인들의 이상 행동들에 관한 첩보가 들려온다.

중부 갈리아를 정복한 로마가 북부까지 올라와 자신들의 영토를 침범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벨기에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곧장 북으로 진군한 카이사르는 레미족의 수도를 공격에 실패한 후 남하하려는 벨기에군과 만난다. 로마군 병력보다 거의 5배나 많은 벨기에 군이었지만 승리는 로마군의 것이었고, 여새를 몰아 벨기에인 중 최강이라는 벨로바키족 영토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후 암비아니족과 네르비족까지 단숨에 정복하게 된다. 이 전투 후 아쿠아투키족의 사절이 찾아와 강화를 요청하게 되고 카이사르는 흥쾌히 이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 강화가 맺어진 날 밤 그들이 로마군영을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 카이사르와 로마군은 배신한 이들을 용납하지 않고 철저히 전멸시켜 버린다. 카이사르는 전쟁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 하지만 서로간의 약속을 어기고 기습을 하는 행위는 명백한 죄이다

갈리아 지방으로 들어간지 2년만에 베네티족을 포함한 7개 부족을 복속시켰고 카이사르에 의한 갈리아의 평화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원로원은 기원전 57년 15일 감사제를 신들에게 올리는 행사를 허락한다.

한편 카이사르가 없는 로마에서는 삼두정치에 대해 원로원이 반격을 시작한다. 폼페이우스의 소극적 자세와 호민관 클라디우스의 폭주 끝으로 카토의 귀국과 키케로의 추방령 해제가 그 원인이었다. 또한 기원전 56년 3월 카이사르는 삼두의 한축인 크라수스를 라벤나에 초청한다. 그리고 둘은 함께 그곳을 떠나 루카라는 도시로 향한다. 폼페이우스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루카에서 만난 세명의 지도자는 다음의 몇가지 사항을 합의하게 된다.다음해의 집정관에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출마를 합의한다. 집정관 다음해는 속주 총독으로 부임한다. 마지막 세번째는 언론 대책이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갈리아 총독 임기를 기원전 50년 말까지 연장하는 법도 제출한다. 기원전 56년과 55년은 평온한 해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무렵 카이사르가 그토록 사랑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다.


이책의 나머지 부분인 갈리아 전쟁 3년째부터 8년째까지는 다음 편에서 계속하겠다.


정치에 입문한 것도 군 사령관으로써 능력을 펼치는 것도 남들보다 그리 빠르지 않었던 카이사르, 그는 폼페이우스가 20대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것과는 달리 40세가 다 되어서야 그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너무 늦은 것은 없다. 그가 그리했던 것처럼 기회를 기다리며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는다면 언젠가 자신에게 주어질 그 기회가 빛의 속도로 자신을 성장시키고 또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순신이 그러했고, 강감찬이 그러했다.

카이사르 그는 참으로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의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내 심장의 박동 수가 빨라 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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