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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터바다 Oct 24. 2021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생기는 일?

모성애 없는 상담사의 공동육아 이야기

우리 무엇을 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하지 않기 위해 모였다.     


“아이가 터전 다니는 게 심심하다고 해요.”

“그냥 나들이 갔다가 밥만 먹고 온 것 같아요”

“뭐 했느냐고 물으면 그냥 놀았다는데 괜찮은 건가요?”

“4~5살은 그렇다 치고 6~7살은 뭔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이가 어디에 재능이 있을지 모르는데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주는 게 중요하지 않나요?”

“왜 인지 교육도 아닌 예체능 사교육도 못 하게 하나요?”

“얼마나 좋은 교구와 양질의 콘텐츠가 많은데 활용하지 않나요?”     




위의 질문에 답을 하기 이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보통의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단체생활이 가능하고, 바깥나들이 가능한 4세부터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럼 7세까지 대략 4년의 유년기를 보낸다. 발달심리학에서는 보통 이 시기를 항문기를 지나고 외디팔 시기로 본다.     


외디팔 시기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간단히 얘기하면 자녀가 이성의 부모를 사랑하는 욕망이 너무 커서 생기는 불안을 동성의 부모를 동일시하는 것으로 해소한다는 얘기이다. 이 시기에 이성의 부모의 유혹적 태도나, 동일시하는 동성 부모의 태도가 적절하지 못하면 유아는 불안이 신경증으로 남아 향후 정신건강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심리학의 창시자 프로이트가 처음 이 용어를 사용할 때에도 반발은 무척 심했다고 한다. 현대에도 유아의 성욕에 대한 발달이론은 여전히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아이들에 발달에 중요한 특성을 나타내는 통찰을 담고 있기에 사라지지 않고 계속 유지 발전되고 있다.     




이렇게 멀리 가지 않아도 이 맘 때쯤 아이들은 자신의 성 정체성에 관심이 무척 많다는 것을 엄마는 직감적으로 안다. 특히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에 대한 성 정체성이 형성되는 시기이기에 유독 또래 관계에서 성 역할에 집착하기도 한다. 그리고 유치 시기 아이들은 동성인 부모의 모습을 무의식적으로 많이 닮아 간다. 행동, 습관, 말투 하나까지 닮아 가는 경우가 많다. 기질적으로 너무 다른 부모라 하더라도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부모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을 마음판에 새긴다. 특별히 트라우마적 상황이 아니라면 대부분 이 시기를 지난 아이들은 부모의 가치관을 내면화하여 초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초자아라고 해서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간단히 말해 부모가 있건 없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스스로 하지 않게 되면 그 아이는 이미 초자아가 형성되어 작동하고 있는 거다. 초자아는 주로 규범과 도덕과 관련된 금기와 관련하는데 이 아이는 비로소 또래와 단체생활을 하며 학습하는 학령기로 넘어갈 준비를 마쳤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초자아의 발달이 이때 완결되는 건 아니다. 모든 발달이 그렇듯 성장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다만 그 최초의 발생과 발달에 중요한 결정적 시기들이 있다는 뜻이다.      


흔히 이 시기의 아이들을 유아 사춘기를 겪는 것 같다고 표현하는 부모들이 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감정과 충동성, 그리고 고집이 절정을 이른다. 그만큼 이 시기의 아이들의 내적 변화가 심하다는 반증일 수 있다. 오죽하면 유아 신경증이라는 명명까지 있겠는가. 아직은 내적인 세계와 외적인 세계가 완전히 구분되지 않는 시기이기도 하다. 상상력이 폭발하고 현실과 상상의 세계가 놀이를 통해 승화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여기에 학습이라니 공사판에서 공부하는 것과 같다. 특히 인지적 학습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이 시기에 아이들에겐 뭔가를 외부에서 넣으려고 하기보다 내면의 세계를 오히려 표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현명하다.     





사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창의성이 중요해지는 시기에 모두 아이들 창의력을 키워 주고 싶어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자기만의 안전한 공간과 시간, 그리고 함께 놀 친구를 두면 된다. 특히 남자아이들은 어른들이 보기에도 다소 격렬한 싸움 놀이에 심취한다. 공격성을 놀이로 건강하게 드러낼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인가. 제발 맘껏 죽고 살아나는 놀이를 할 수 있게 놓아 두기 바란다. 거기에 어른의 좀 더 생산적인 놀이 좀 더 유익한 놀이라는 말도 안 되는 잣대는 거두어 두길. 놀이는 놀이 자체가 목적이다. 놀이가 수단이 되는 순간 그건 어떤 좋은 말을 가져다 붙인다고 하더라도 놀이가 아니다.     


서론이 길었다. 아이들의 놀이와 배움의 과정을 지켜보며 우려하는 부모님들의 불안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아이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가만히 들여다보라 누구의 불안인가. 아이의 것인가. 부모 자신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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