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지 May 09. 2024

대치동 일타강사의 ”대기자 충원합니다.”

어느 고3 엄마의 슬픈 수강등록 이야기

"띵!"

"ooo 선생님 대기자 충원합니다."


핸드폰 문자알람을 확인하던 순간, 소파에 기대앉았던 몸이 직각으로 곧추세워졌다. 무조건 반사의 속도로  얼굴에 웃음이 번져나갔다. 기다리던 애인의 소식이 이만큼 반가우랴! 로또 당첨 소식이 이토록 반가우랴!(아.. 그런데..이건 조금... 반갑겠다. ㅎㅎ) 짝사랑하던 남자의 문자라도 이만큼은 반갑지 않았을 거다.


나를 극강의 흥분에 몰아넣은 것, 몇 달 동안 애태우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것은 바로 대치동 일타강사의 대기자 충원문자였다. 언제부터인지 극성(?)인지 열정인지 모를 마음을 내려놓은 엄마로 살고 있는 나는 남들보다 한발 빠르게 행동하는 게 너무나 어렵다. 학년에 따라 들어야 하는 선생님도 다르고 내 아이와 맞는 선생님도 다르다는데 그런 정보는 물론이요, 빛의 속도로 마감된다는 대치동 쌤들의 수강신청은 나에게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미션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이제껏 한 번에 성공한 적이 없는 실력. 벌써 우리 애는 고3인데.


어쩌면 극성엄마를 내려놓았다기보다는 처음부터 나에게 그런 엄마의 자질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소위 말하는 엘리트코스 까지는 언감생심 엄두도 못 냈었지만 기본코스는 밟고 살아야지 싶었는데 아이가 '엄마, 친구들도 다 들어, 나도 신청해줘'라고 말하기 전에는 그 선생님이 그렇게 유명한 선생님인지도 모르고 산다. 이렇게 사는 게 나름 편하긴 하지만, 고3이 되고 보니 그것도 아니다. 하루도 허투루 보낼 수 없는 시간을 보니 내가 너무나 게을렀구나 하는 자책감이 든다.


예비고3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현고3의 입시가 끝나고 새로 강의가 열릴 때를 기다려 잽싸게 수강신청을 하는 것인데 이게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날짜와 시간을 예고하고 시작하는 인기과목 수강신청은 보통 1분 컷이다. 1분 컷. 이게 임영웅 콘서트도 아니고 대체 무슨 일인지. 나도 엄마는 처음인지라 모든 것이 어설퍼, 손까지 벌벌 떨며 클릭을 해도 대기번호 수백 번대로 밀리는 것이 다반사다. 그럼에도, 한 번도 한 번에 성공한 적이 없는 엄마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계속해서 수강신청을 부탁하는 딸이 고마울 정도다.


그렇지만, 아무리 수강신청에 재능이 없는 엄마라고 하더라도 애는 타는 법. 아무리 뒤늦게 웨이팅을 걸었다지만 대치동 인기 강사의 순번이 도무지 오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6모 전에는 시작을 해야 하는데 어쩌나.. 속은 타들어가고 이제나 저제나 시간은 흘러갔다. 그렇게 속절없이 오지 않을 문자를 기다리던 즈음... "띵" 하는 반가운 소리와 함께 구원처럼 문자가 온 것이다.


"미적분 oooT

일 AM 09:00-12:30


0월/0일부터 수강을 희망하실 경우 오늘까지 학원으로 전화 바랍니다."


두 눈을 의심했다. 어머나! 어제 전화했을 때만 해도 대기 순서 50번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오늘 횡재수가 있었나? 두 눈은 의심을 했지만 내 손은 벌써 통화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아직 학원에서 허락한(?) 기한이 몇 시간 남아있었지만 1분 컷 탈락에 익숙해져 있었던 나는 주저하거나 망설이거나, 생각이라는 걸 할 겨를이 없었다.


"등록할게요!"


잽싸게 등록을 마친 나는 승리의 이모티콘을 날리며 딸아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수강신청 성공했다고. 이것 보라고. 엄마가 이 정도라고. 드디어 해냈다고.


학원등록 하나 성공했다고 이렇게 의기양양할 일인가 싶지만 왠지 모르게 목에 힘이 들어가고 어깨가 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 다 되었다. 수학대기자 충원을 마지막으로 과탐 수업 두 개까지 주말 하루를 대치동에 갈아 넣을 시간표를 짰다. 이제 라이드 계획만 세우면 된다. 여태 껐은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학원에 오갔지만,  이젠 그야말로 고3이니 길바닥에 버리는 체력을 아껴주리라!


그런 다짐과 결의 속에 다가온 개강 전날 저녁.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는 딸아이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저벅저벅 나를 향해 걸어오더니 불쑥 핸드폰을 내밀고 손가락을 짚어 하얀 화면 속을 가리킨다.


"일요일 AM 09:00 미적분 oooT"


아, 뭔가 했네. 이거 기다리던 선생님 수업문자 아닌가. 내가 아까 전달해 준.


"그게 왜?"


당당하다 못해 귀찮다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니 나를 어이없이 쳐다본다. 그 눈빛에 지지 않고 "왜?" 를 외치는 나에게 "일요일 아침 9시인데?" 한다. 뭐가 이렇게 당당한가 싶어 약간은 쫄았지만, 나는 잘못한 게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당당해도 되겠다 싶어, "어! 그게 뭐? 네가 해달라는 대로 신청한 거잖아? 이거 봐!" 라고 말하며 아이가 보내주었던, 이렇게 주말 시간표를 짜달라고 적어주었던 그, 시간표를, 찾아, 클릭.. 을... 했다.. 아..! 그런데... 그런 순간은 처음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그 식상한 표현이 찰떡같이 맞아떨어지는 그런 순간은.


이게 뭐지? 아이가 보내온 쪽지에는 '일요일 AM 09:00 과탐 ooo쌤'이라고, 그러니까 수학시간표가 아닌 과학시간표가 떡하니 적혀있었던 것이다. 어? 수학이 아니라... 고? 믿을 수가 없었다. 아이는 대치동에 여러 번 가는 게 힘들다며 대치동 수업을 하루에 몰아 듣겠다고 계획을 세웠고, 나는 그렇게 시간표를 짰다고 굳게 믿었는데,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시간표는 토요일도 학교와 대치동을 오가고, 일요일도 대치동을 가야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시간표였던 것이다. 어떻게 나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이럴 수가 있었지?


그 순간 머리가 미친 듯이 간지럽기 시작했다. 처음이었다. 그렇게 머릿속이 끔찍하게 간지러웠던 적은. 스트레스를 갑자기 급격하게 받으면 머리카락이 하룻밤새에도 하얗게 새 버린다는데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가 싶었다. 그러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나의 실수였던 거다. 토요일 수업을 신청했어야 했는데 혹시 몰라 일요일에도 웨이팅을 걸었던 것이 사단이었다. 대기자 충원이라는 달콤한 문자에 현혹되어 내가 등록하려던 요일이 토요일인지 일요일인지 헷갈렸던 것이다. 일요일을 취소하고 다시 토요일 대기로 돌아가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알아보았더니 안된단다. 일요일 수강을 확정 짓는 순간, 웨이팅을 걸었던 토요일 수업은 웨이팅이 삭제되었단다. 아이고야.


원하는 시간표를 짜려면 다시 또 몇 달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우리 딸이 처한 상황이었다. 지금 이건 연습이 아니라 실전인데. 나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었다. 어찌해 볼 해결책이 없는 상황이었고 그 이후에 우리 집에 펼쳐진 풍경은… 상상하는 그대로다.


자책감에 잠을 설치고 난 아침, 미안하고 스스로가 한심해서 눈도 뜨기 싫은 나에게 아이가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하루에 몰아가려고 했던 대치동을 3일에 걸쳐 가겠다는 거다. 자기는 이미 그렇게 마음 정했으니 아무것도 해결하려고 하지 말란다. 엄마가 손을 대면 더 꼬인다니 더 무슨 할 말이 있을까. 그저 미안했다.


그러고 나서는 진짜로 마음이 풀어졌는지 아침을 먹으며 "엄마, ooo라고 알아?" 라고 말을 붙인다. 요즘 떠들썩한 하이브와 민희진에 관련된 연예 뉴스, 언론에 공개된 적 없는 비하인드라며 신이 나서 이야기를 줄줄 해준다. 어제의 절망적이었던 스탠스와는 사뭇 다른 태도에 당황스러웠지만 그것도 잠시, 나에게 관심 없는 연예뉴스라는 것이 뭣이 대순가 싶었다. 어제 지은 죄가 있는지라, 최대한 영혼을 실어 대답을 했다.


평소와 다른 나의 리액션에 만족했는지 아이는 정말로 기분이 좋아져서 집을 나섰다. 그렇게 나를 혼비백산하게 했던 어제의 일은 잊었다는 듯, 씩씩하게 집을 나서는 우리 고사미의 뒷모습에 진짜 눈물이 날 뻔했다. 정말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서.


연예뉴스 덕분에 넘긴 위기라니... 국영수에만 관심 있는 아이이길 바랐는데, 어쩌면 국영수에만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 또한 뭣이 대순가…! 아이가 어제의 황당함을 훌훌 털고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는 것이 중요하지. 그새 내 마음도 편안해졌는지 슬쩍 웃음이 나왔다. 그것 참.. 엄마로 산다는 거, 그것도 고사미 엄마로 산다는 게 참 쉽지가 않다.


이전 03화 샤워하다 새벽 세 시, 이걸 어쩌면 좋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