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미의 짠한 전력질주
맑고 화창한 봄날이다. 긴 겨울을 지낸 노고를 서로 치하하듯 화사한 꽃들이 앞다투어 피어나는 이 봄날엔 아이들의 마음에도 꽃바람이 부나 보다. 바야흐로 체험학습의 시기니까. 교복을 벗고 사복을 입은 교복둥이들이 내 눈에는 꽃보다 예쁘다.
음...꽃보다 예쁘긴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 눈에 그렇다는 거고 십대들이야 어디 그런가. 꽃이 무색하게 꽃단장을 해야겠지. 극강의 J와 극강의 P를 넘나드는 우리 고사미는 이번엔 극강의 J모드를 장착하고 체험학습 준비에 임한듯했다. 체험학습 D-7을 찍던 날부터 오밀조밀한 택배 상자들이 도착하기 시작한 걸 보면 말이다. 남자아이들이 사는 집에는 어떤 풍경이 그려지는지 모르겠지만 딸 둘을 키우는 우리 집에는 체험학습 전, 자그마한 택배가 산을 이룬다.
밤늦게 지친 얼굴로 들어온 아이가 택배 상자를 보곤 반색을 한다. 피곤할 법도 한데 택배상자를 열어 옷을 하나하나씩 입어보고는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보느라 분주하다. 이때, 엄마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무조건 아이의 들뜬 마음에 장단 맞추는 것이다.
드디어 체험학습날 아침. 제아무리 학교가 싫은 고사미도 한 번에 잠에서 깨는 흔치 않은 아침이다. 왜 늘 체험학습은 중간고사 전에 있는 건지 모르지만, 마음을 비워야 한다. 학교가 센스 있게도(?) 금요일에 체험학습을 잡았으니 너무 피곤해하면 토요일 학원은 빠지면 되겠지 하고 마음도 먹는다. 가만있자, 그런데 작년엔 몇 시에 들어왔더라? 11시? 12시?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저녁 9시쯤 뜻하지 않게 현관문이 열리더니 딸아이가 들어오는 거다. 믿기지 않는 마음에 "왜 이렇게 일찍 왔어?" 하니 우리 고사미 왈, 피곤해서 일찍 왔단다. 바로 잘 거란다.
낯설었다. 우리 딸 입에서 노는 게 피곤하다는 소리가 나올 줄이야.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다음날 예상치 못하게 일찍 일어난 아이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더니 학원에 가겠다는 것이었다. 아침 8시부터 시작되는 모의고사를 신청했다나. 물론 알고는 있었지만 당연히 취소각이라 생각했는데.
여느 때와 다르게 아무 불평 없이 차에서 내려 학원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에서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 이렇게 사춘기도, 반항도 끝이 나는 건가, 싶은게 그동안 아이와 줄다리기했던 마음들이 일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걸 모르고 그동안 그렇게 마음을 졸이고 잔소리를 했었나… 마음이 괜시리 짠했다.
이제 막 고3이 된 것 같은데, 수능이 코앞에 다가온 것 같은 기분이다. 수능이 뭐길래 이리도 가슴에 돌덩이를 얹은 듯한 느낌인지. 단 하루동안에 12년 학창생활의 성적표를 받아 들게 되는 날이라 그런가. 물론 수능점수가 12년의 성적표일 수는 없지만, 대학에서는 그 점수 하나만을 보고 아이를 평가하게 될 테니 아이 입장에서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점수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열아홉 살에 치러질 수능을 위해서, 초중고 12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마라톤으로 뛰어야 할 거리를 100미터 달리기로 뛰라고 강요받고 있는 것처럼. 매 순간 전력질주를 하듯이 숙제와 시험에 치이면서, 혹은 숙제를 못한 죄책감과 무력감에 시달리면서 많은 것들을 잃은 채로 말이다.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점수를 얻기 위해 포기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
이때까지와는 다르게 본격적으로 수능에 맞춰 생체시계를 굴리는 아이를 보면서 어쩌면 이 모습이 가장 정직한 모습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초등은 초등답게 신나게 놀고, 중등은 중등답게 친구들과 또래문화 쌓기에 몰두하고, 그리고 공부는 고등학교에 가서 전력질주하는 그런 모습 말이다. 그렇게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고등다워지는 아이가 건강한 입시를 치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초등 때부터 고등과정 선행을 하는 건 아동학대야! 라며 아이와 주고받던 농담들이 좀처럼 농담처럼 생각되지 않는 요즘이다. 의대증원 2000명이 화두인 이때, 초등 의대반으로 몰리는 아이들이 잃어버릴 것들에 괜시리 마음 쓰이는 것은, 아마도 내가 나이가 들어서겠지.
아이가 체험학습에서 졸업앨범에 들어갈 사진이 예쁘게 찍혔다며 사진을 몇 장 보내주었다. 이런저런 포즈로 찍은 사진에 엄마미소가 절로 나왔다. 며칠간 더 들떠있을 만도 한데, 12시가 되어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처럼 다시 까만 추리닝(?)에 까만 후드집업을 입고 학원으로 향하는 모습에 또 코끝이 시큰해졌다. 에구구.. 나에게 깨달음이 아니라 갱년기가 왔나 보다. 그나저나 힘껏 놀고 오느라 지치고 피곤했을 우리 고사미에게 오늘은 어떤 집밥으로 위로를 건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