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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지 Apr 17. 2024

이렇게 예쁜 고사미가 있을까요

고사미에게 바치는 사랑의 헌사

밤늦게 들어온 아이가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주섬주섬 꺼내고 있다. 안경집에 고이고이 담아가지고 온 그것을 조심스럽게 유리병에 담는데, 가만히 보니 다름 아닌 종이학이다. 난데없이 종이학이라니! 유리병으로 눈을 돌리니 벌써 열마리가 넘게 종이학이 들어차있다.

 

"종이학 접었네?"

"응 공부 안될 때마다 접었어."

"네 마리 접은 거 보니까, 오늘 네 번 공부가 안되었나 보네."

"응, 엄마 이거 접는데 시간 얼마 안 걸려."


하루종일 공부하고 왔을 텐데 네 번만 공부가 안되었다니 오늘 하루도 열심히 했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아이는 혹여 내가 공부 안 하고 딴짓했다고 타박이라도 할까 봐 미리 선수를 친다. 어릴 때부터 공부하라고 다그친 것이 사춘기 내내 미안했는데 아직도 엄마 마음에 죄책감의 불씨를 살살 태우다니. 야속한 마음이 들었지만, 원망도 잠시 종이학 접은 솜씨가 너무나 고왔다. 


"근데 종이학은 왜 접었어?"


라고 물으니 더 예쁜 대답이 돌아온다. 


"종이학 접어서 대학 가려고."

"아..! 신박한데...! 공부가 아니라, 종이학 접어서 가려고..?"


농담 삼아 한 말에 웃음이 터졌지만 종이학이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그런 미신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역시 대한민국 고사미가 맞구나 싶었다. 사춘기 내내 하도 대화가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도 몰랐는데 그래도 이만큼 생각하는 걸 보니 웬걸, 고맙기까지 했다.


아이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있고,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있다면 나는 후자다. 나는 내 딸이지만 내 속에서 낳은 딸인가 싶은 적이 많다. 내 속에서 나왔으니 조금이라도 이해의 실마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텐데 딸아이와 나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이상이다. 지구와 안드로메다만큼의 거리랄까. 


중학생 때부터 가지고 있는 늦게 자는 습관도 고쳐지기를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협박도 해봤지만, 고사미가 된 지금마저도 그 습관을 놓지 못한다. 버티는 자가 이기는 거라고 했던가. 우리 고사미는 엄마의 핍박을 견뎌내며 습관을 고수했고, 반면 버티지 못하고 진 건 나였다. 분명 피곤에 못 이겨 자야 하는 건 딸아이였을 텐데 결국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자버린 건 나였다. 개운한 눈으로 개운하지 못한 딸아이를 매일 아침 깨우는 일은 참... 말하자면 유쾌하지 못한 일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이해를 하자 하고 마음먹은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느닷없이 딸아이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늘 항변하던 말 "여태 공부하고 왔는데 이렇게 그냥 자버리면 나는 언제 쉬어?"라는 그 말이 이해가 가기 시작한 거다. 그렇다고 쉬는 것이 곧 자는 것이라는 내 지론을 버린 것은 아니다. 그저 '아 내 딸은 현재가 중요한 아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벼락처럼 왔달까. 


아이에게는 어쩌면 미래를 위해 산다는 것이 와닿지 않는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 좋은 미래가 갖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현재의 즐거움이 그것을 뛰어넘을 만큼 간절하지 않은 나이. 그게 내 딸아이의 나이라는 것이 깨달아졌다. 부모의 안온한 보호 속에 자라는 미성년 아이의 특권 같은.


다행인 것은 이제는 내가 현재가 중요한 아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것이다. 2주 뒤에 시작될 중간고사보다 내일모레 떠나는 체험학습이 중요한, 내일 일찍 일어나는 것이 힘들어도 오늘의 즐거움을 찾겠다는 의지가 있는 아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그 뚝심이 '뭘 해도 될 아이'의 조짐이기를... 하는 바람도 한 스푼 살짝 얹는다면 미련일까.. 그래도 하나 장담할 수 있는 건 이 나이를 이 나이답게 살아야 더 건강하고 더 단단한 어른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제 수능, 몇 개월 남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이 시기를 함께 보내는 내 마음이 아이에게 퐈이팅을 외치는 파이터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의 시간은 그저 성장하는 시간일 뿐이라고. 꼭 지금 이때만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가 아닐 거라고. 누구보다 먼저 살아본 내가 그걸 믿어주어야 할 것 같다. 


4월, 유독 마음이 아픈 달이라 그런지, 학접어 대학 가겠다는 그 신박한 마음마저 예쁜,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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