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딸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아이의 대입결과가 엄마의 성적표 같다는 생각을 나 혼자서만 한 줄 알았는데 엊그제 만났던 수험생 엄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단다. 바로 지금의 나와 비슷한 순간, 첫째가 정시 포함 수시 6 논술에서 전부 불합격 판정을 받았을 때.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해 왔었기에 그 순간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에 당황했더란다. 어? 나도 우네? 하고서. 그리고서 꼬리를 물었던 생각이 바로 K-수험생 엄마들이 다들 한다는 바로 그 자책 시리즈다.
"내가 어디서 뭘 잘못한 거지? 나 때문인가? 제 때 학원을 못 알아봐 준 건 아닌가? 내가 좀 더 알아보고 정보에 빠삭한 엄마였더라면 합격하지 않았을까?..."
사교육 시장은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치열해서, 네다섯 살만 되어도 잘하는 아이, 못하는 아이 갈린다지만 그때야 다분히 주관적인 시각이고, 그 모든 객관적 판가름이 대입 결과에서 가름되니 이때야말로 진짜다. 진짜인 만큼 두려운 시간이다.
얼마 전 기도모임에 평소보다 조금 늦게 나갔더니 이야기꽃이 한창 피어있었다. 그 모임은 다분히 첫째 엄마, 둘째 엄마, 첫째 N수생, 둘째 N수생 등등의 다름이 모인 곳, 불안과 여유의 정도가 다 다르다. 나는 불안강도가 가장 높다는 첫째 현역 고사미 엄마. 내가 들어갔을 무렵엔 첫째를 재수시켜 대학에 보낸 둘째 고사미의 엄마의 이야기가 잔잔히 시작되고 있었다.
"첫째 때, 수능을 보고 나온 아이와 딱 눈이 마주쳤는데 아이가 우는 거야. 어떡해. 정말 같이 울고 싶더라고. 결국 6 논술 모두 불합격 소리를 들었지. 그리고 별 수 없이 재수를 시작했어요.
또 수능날이 됐네! 아기가 수능을 보고 나오다 나와 딱 눈이 마주쳤는데 또 우는 거야!
정말 하늘이 무너지더라고. 그때부터 마음이 바빠졌어. 이대로는 안된다 생각하고 온갖 컨설팅 학원에 전화를 돌렸지. 유명한 데는 다 마감이야 벌써. 전화 컨설팅을 했더니 이 성적으로는 정시 불가능 이래. 어떡해 논술밖에 없구나. N수는 안된다."
이야기가 어찌나 실감 나는지, 요즘 가장 핫한 관심사라 그런지 드라마보다 더 흡인력 있는 전개다. 그 집 딸은 수시논술로 아주 약한 곳을 두어 곳 써놓았는데 그중 한 곳만 공략하기로 했단다. '엄마, 나 재수까지 했는데 여기 가?' 따위의 말은 무시했단다. 재수시키는 데 한두 푼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더 해도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기에 입시는 올해로 끝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단다.
수능 끝나고 일주일간, 수시 논술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는데 그 시간을 넋 놓고 놓치면 안 된단다. 물론 수학을 잘하는 아이들은 수시논술 트레이닝 한두 번만 받고도 척척 붙기도 하겠지만 자기는 아이의 현실을 직시했단다. 그 순간 학교 레벨에 대한 쪽팔림(?) 따윈 안중에도 없었단다.
"나 그때 반성 많이 했어. 내가 간절함이 부족했구나.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 이게 기도해서 될 일인가. 기도한다고 성적이 오르지는 않잖아, 라는 나의 안일한 생각. 그래서 기도도 별로 안 하고 기도모임에도 안 나왔었지.
그런데 일단 발등에 불 떨어지니까 이 미친듯한 간절함도 엄마의 몫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거야.
다른 엄마들은 기도에도 최선을 다하는데 나는 뭐지? 기도마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게 뭐가 됐든 엄마의 최선은 다하고 싶더라고."
결국 그 간절함은 그 아이의 합격을 이뤄냈고, 그 아이는 지금 다시 더 이름 있는 대학에 가기 위해 편입을 준비하고 있단다. 이야기는 흥미진진했지만 그래서 결국 또 대입을 위한 공부를 한다는 현실. 진짜로 대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대한민국의 고질병 같은 대입로드다. 결국 한국 경제가 엉망인 이유는 이 미친 사교육의 맴돌이에 있지 않나 하는, 불특정 대상을 향한 원망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었다.
이 이야기가 다시 생각난 건 오늘 들려온 뜬금없는 누군가의 합격소식 때문이었다. 오늘도 기도 시간 전에 잠깐의 수다타임이 있었는데, 오늘따라 그동안의 이야기들과 결이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초중등학교 때 고만고만했던 아이들이었는데 누구는 약대원서를 썼다, 어디 의대를 썼다, 진짜 걔가 그렇게 공부를 잘했어요? 등등의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어느 엄마의 수시 1차 합격 고백이 이어졌다.
암묵적으로 기도모임에서 공론화할 수 없는 이야기였는데 이런. 사실 얼마나 좋으면 그랬을까 싶긴 했지만, 그 소식들이 쿡쿡 마음을 찔러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였는데, 부러움 때문이었는지 난데없이 코끝이 또 찡해졌다. 꾹꾹 울음을 참으며 기도한다고 했는데 목소리가 나올 리 없었다. 부지런히 손수건만 눈과 코로 바쁘게 움직이다가 기도가 끝났다. 엉망이 된 얼굴을 들 수가 없어서 꼼짝없이 앉아있는데, 옆자리 엄마가 가만히 내 등을 쓸어주었다.
"나도 첫째 때 별명이 수도꼭지 엄마였어요." 하면서.
아이구야.... 안 우는 척 애를 썼지만 결국 들켜버렸네... 낭패 같았던 기분도 잠시, 등을 쓸어내리는 그 손길에서 진심 어린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대입을 겪는 과정에서 합격과 불합격이 갈리는 상황은 모두에게 정반대의 기분을 가져다주겠지만, 어찌 보면 모두 비슷한 불안을 겪으며 지내는 시간들이기도 할 것이다. 아마도 이 입시라는 건 12년의 엄마 성적표가 아니라 자식을 키워낸 엄마들의 마음이 조금 더 성숙해지는 퀸덤점프의 시기일지도 모른다. 엄마들의 전우애,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을 겪은 모든 엄마들이 가지는 공통의 유대감처럼 말이다.
그러니 대입의 시기를 먼저 겪은 선배 엄마들의 따뜻한 조언, '니 맘 다 알아' 하는 무언의 따뜻한 눈빛에 나는 또 위로를 받는 게 아닐까.
그나저나 수시 1차 합격했다는 그 집 딸내미는 합격발표 나기 전 주말에, 스트레스로 엄마를 무척이나 괴롭혔다던데, 우리 딸은 지난 주말 내내, 밥 하기 싫다는 엄마에게 "엄마, 수능 끝나면 내가 밥 해줄게."라고 말해주었다. 이쁘고 기특한 딸내미. 수능이 20여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히스테리 대신 기쁨을 주네. 하하.
아마도 지난 주말, 라이프퀄리티 면에선 내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