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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지 Oct 20. 2024

엄마의 쓸모

나는 과연 몇 점짜리 엄마였을까.

토요일 아침,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며(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토요일 자습이 있다.) 간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수능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토요일에 일찍 깨워 내보내야 하는 일은, 같은 인간으로서 좀 잔인하다 느껴지기에 내가 건넨 말들에는 미안함이 굽이굽이 서려있었다.


요즘 아이들이 학교에 자주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며 학교가 집중이 잘 안 되어서 많이들 결석 혹은 조퇴를 하고 독서실로 간다는 이야기, 너는 어떠냐고 물었더니 아무래도 관리형 독서실보다는 집중이 덜 된다는 이야기들. 한동안 학교자습을 안 하고 관리형 독서실을 이용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땐 학교가 낫다더니 아무래도 발등에 불 떨어지니 옆자리 소음 하나하나가 신경이 쓰였나 보다. 일찍 물어봐주고 독서실 자리를 좀 알아볼걸 하는 후회는 D-26이라는 숫자 앞에서 무색해졌다. 그래서 그냥 마냥 미안하다고 했다.


이 수능이라는 것, 이 대입이라는 것은 아이에게 12년간의 성적표일 뿐만 아니라 엄마에게도 학부모로서의 최종 성적표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과연 몇 점짜리 엄마였을까.


차에서 내려 터덜터덜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또 코끝이 찡하다. 요즘 이놈이 문제다. 별 거 아닌 일에 자꾸 코끝이 찡해지는 이 증상. 설거지를 하다가도 눈물이 나고, 자려고 누워서도 가끔 서럽다. 내 생활이란 게 달라진 게 없으니 이 증상이 고사미 엄마라서 그런 건지, 갑자기 닥친 갱년기 호르몬 변화 때문인 건지 알 수는 없다. 그래도 요즘은 마냥 시도 때도 없이 코 끝이 찡한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꼭 사연 있는 여자 같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데 달빛이 환하다. 괜히 위로가 된다.


오늘 아침 유난히 마음이 안 좋았던 건, 아이가 늘 뜨는 둥 마는 둥 하는 아침식사를 하는 통에 나 또한 밥을 주는 둥 마는 둥 하며 대충 차려줬다는 것 때문이었다. 유난히 눈이 안 떠진 오늘 아침에 해준 건 다름 아닌 계란비빔밥. 그런데 아이의 표정이... 음...


“엄마, 나 아침에 계란 먹으면 속 쓰리다고 했는데.. "


아차. 그랬었지. 맞다. 기억이 났다. 아마도 계란을 먹으면 왜 속이 쓰린지 이해가 가지 않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것 같았다. 흑.. 그런데 어쩌겠나. 이미 벌어진 일을. 그런 아침을 보낸 탓에 차에서 내린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죄책감과 미안함에 그 문제의 콧등이 시큰거렸던 거다.


아... 나는 언제쯤 엄마다워질 수 있을까. 우리 엄마였다면 이런 실수는 없었을 텐데. 어쩌면 엄마가 나를 너무 정성스럽게 키워줘서 나도 나를 정성스럽게 대하느라 아직 좋은 엄마가 못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들었다.


수능이 다가오니 봉헌초가 늘어간다. 촛불이 환하다. 


고사미와 갱년기가 겹쳐오니 실로 대략 난감이다. 수능이 다가올수록 가을이 깊어가고 호르몬도 말썽인 마당에 이대로 두면 깊어가는 가을만큼 나의 우울도 깊어갈 것 같아 쓸데없는 생각을 접고 무언가 생산적인 생각을 하기로 했다.


안 그래도 약한 체력을 안고 태어나, 그런데도 하고 싶은 거 놀고 싶은 거 다 하느라, 나를 혹사시키고 살았는데 나이가 드니 그마저도 쉽지 않다. 그러니 내가 요즘 가장 많이 바라는 건 나에게 24시간이 아니라 48시간이 있었으면 하는 것. 쉬엄쉬엄 하고 싶은 일들 다 마치고 잠자리에 들고 싶다는.


그런데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러니 이젠 내가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적당히 배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배분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균형 있게 잘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나는, 집밥과 청소를 좀 줄이기로 했다. 깨끗한 집도 좋고 따뜻하고 정갈한 집밥도 너무나 좋아하지만, 내가 치워도 치워도 집은 늘 어질러지니 일단 청소는 일주일에 두 번만 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눈을 감는 거다.


그렇다면 집밥은 어쩌나? 이게 가족들에게 제일 미안한 부분이라서 말이다. 그런데 오늘 재미있는 기사를 하나 읽었다. 집밥에 대한 정의가 바뀌고 있단다. 예전에는 조물조물 무친 나물과 집된장으로 끓인 된장찌개와 같은 정성정도는 들어가야 집밥이었다면 이제는 레토르트를 먹든, 반조리용 배달음식을 먹든 집에서 먹는 밥이 집밥이 되었다는.


그런데 굳이 집밥의 정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집밥 그 한 끼를 차리기 위해서 장을 보고 식재료를 다듬고 조리를 하고 치우고 설거지하는 모든 과정이 실상 버겁고 비효율적인 거 아닌가? 물론 이건 나의 죄책감을 덜려는 자기 최면에 가깝긴 하다. 나는 아직 뼛속까지 k-엄마이니까.


어쨌든 하고 싶은 일은 많고 해야 할 일도 많고, 집안일은 점점 하기 싫어지니 나에게도 도망갈 틈을 마련해 줘야겠다. 아무리 수험생 엄마, k-엄마라도 내랴놓을 건 얼른 내려놓아야지.


마음만이라도 이렇게 먹으니 한결 편안하다. 그래도, 한 달 남은 k-고3이의 아침상은 소중하니 내 딸의 아침밥엔 k-엄마의 진심을 다해보련다. 이걸 먹어도 배 아프고 저걸 먹어도 속 쓰리다는 딸과 고심하며 메뉴를 조율하는데 갑자기 한 가지 반찬에 의견 통일이 되었다!


“두부조림!"


하하. 그 간편하고 쉬운 반찬을 두고 어려운 것만 생각했다니,, 구원처럼 온 두부조림에 k-엄마의 죄책감이 조금 가벼워졌다. 아이구!! 그런데 얼른 장 보러 가야겠다. 요즘 하도 음식을 안 했더니 냉장고에 두부도 없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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