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기원 초콜릿, 내가 너에게 주어야 하는 거 아니니?
어느 날 아이가 상기된 얼굴로 퇴근(?)을 했다. 밤 11시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 손에 들려있는 것은 다름 아닌 커다란 돌덩이 같은 은박 보냉백.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풍경에 어리둥절한 눈 맞춤도 잠시, 아이는 신이 난 듯 이리 와보라며 손짓을 한다.
"엄마, 엄마가 두바이 초콜릿 먹어보고 싶다고 했잖아! 내가 저녁을 먹는데 맞은편 가게에서 이걸 파는 거야! 맨날 품절이었는데. 그래서 내가 사 왔어!"
등에는 자기보다 큰 가방을 멘 채로, 손에는 큰 돌덩이 같은 보냉백을 들고선 아이가 꺼내 든 건 다름 아닌 손바닥만 한 두바이 초콜릿. 이 조그만 초콜릿을 왜 이렇게 큰 보냉백에 담아 왔냐니까, 냉장 보관을 해야 하는 초콜릿이라서 그랬단다. 두 시간 이상 걸린다고 했더니 사장님이 남아있는 아이스팩을 다 주셨다고. 그리고는 공부를 끝내고 집에 와서 소중하게 펼쳐 내 손에 건네준 것이다.
아니, 가방도 무거운데 어떻게 이걸.. 이제 수능이 40여 일 남았는데 무슨 정신이 있다고...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해도 모자란데...라는 생각에 뭉클했던 것도 잠시, 한입 가득 베어 먹은 두바이 초콜릿에선 상상 이상의 맛이 났다.
"와~ 이거 진짜 너무너무 맛있다~~~!!"
"그치 그치??"
사이좋게 나눠먹은 두바이 초콜릿이 한 조각이 남자, 아이가 그것을 다시 주섬주섬 작은 지퍼백에 담는다. 엄마 내일 꼭 먹으라며, 동생에게는 건드리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걸 보는 내가 우리 딸이 최고라며, 엄마가 딸 하나는 기가 막히게 낳았다며 칭찬을 늘어놓자 아이가 하는 한마디가 심장을 쿡 쑤신다.
"그러니까 공부 좀 못해도 이해해 줘~"
아이구야. 공부 그게 뭐라고... 수능 앞두고 내심 긴장했던 내 마음이 스르르 녹았...다...그런데...?! 혹시 수능이 다가오니 공부를 열심히 하는 대신 연막 치기 작전(?)으로 돌입하기로 한 거니? 흠... 요즘 이상스레 나에게 호의적(?)이긴 했다. ㅎㅎ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나도 아이에게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집중하는 엄마였던 건 아니다. 어찌 보면 우린 둘 다 서로 본업에, 그러니까 학생은 공부를 하고 엄마는 서포트를 하는 그런 업에 좀 덜 충실했던 것 같기도 하다.
스스로 밥을 먹게 되고 학교에 다니게 되고 친구를 알아가게 되고 자기만의 세상이 생긴 이후부터는, 그러니까 사춘기가 오고나서부터는 반 강제(?) 적이긴 했지만 심적으로 서로 독립이 된 사이라고나 할까. 아이와 모든 일을 함께 한다거나 하루일과를 꿰고 있다거나 아이의 관심사를 모두 알고 있다거나, 아이가 필요로 하는 곳에 늘 대기하고 있다거나 하는 그런 매우 돈독하고 친밀한 관계라기보다는 서로에게 조금 느슨한 관계.
물론 그런 엄마로 살고 있지만 아예 죄책감이 없는 건 아니다. 요즘 좀 스스로 너무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은 아이가 다니는 학교가 수요일마다 야간자율학습이 없다는 사실을 내가 종종, 아니 너무 자주, 아니 내처 3년간을 잊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수요일마다 학원을 갈 때가 있었고, 친구들이랑 시간을 보낼 때도 있어서 규칙적인 라이딩을 하지 못했다는 핑계가 있긴 해도 수능을 40여 일 앞둔 요즘에도 수요일 밤이 되면 아차! 싶다.
'얘는 오늘 어디에 있는 거지?'
대부분은 하교하고 동네 도서관에 들러서 집에 오는 딸이지만, 왜 내 머릿속엔 3년 내내 '수요일 야자 없음'이 각인되지 않은 건지, 그런 나의 무관심에 요즘은 자책이 된다.
그런데 또 어찌 보면, 그렇게 무관심할 수 있는 건 아마도 아이에 대한 믿음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알아서 하겠지, 학교 끝나고 어디에선가 공부하고 있겠지, 하는 믿음. 나를 걱정시키는 일 따윈 하지 않을 거라는 그런 값진 믿음 말이다.
요즘 다니고 있는 성당의 기도모임의 한 엄마가 요즘 얼굴이 어둡길래 물었더니 의외로 고사미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대학생이 된 딸의 사춘기가 고민이란다. '대학생의 사춘기요?' 하고 물으니 대학생인데, 고등학생 때처럼 엄마가 모든 걸 다 해주기를 원하는 것 때문에 서로에게 힘든 시기라고 한다. 이제 성인이 된 딸에게 모든 걸 스스로 하라고 하니 적응을 못한 딸이 엄마와 신경전을 벌이는 중인 것 같았다. 말하자면 서로에게 아직 독립이 안 된 상태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아마도 나는 대학생 사춘기는 만날 일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서로 이미 그런 면에 있어선 독립이 된 사이니… 음.. 미리 맛보는 안도감이랄까. 뭐 물론 그보다 먼저 대학생이 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ㅎㅎ
수능 D-40일. 당연지사 발등에 불 떨어진 양 조급함이 보여야 될 시점인데, 두바이 초콜릿을 사 오는 여유 있는 딸을 보니 슬며시 걱정과 불안이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게, 이 시점에서 잔소리해서 될 일인가. 그저 이제는 평온하게 시험까지 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수밖에. 불안은 득이 될 게 없으니 이것도 은총인가 싶다. 지난 3년간 내처 잊은 ‘수요일 야자없음’이 딸에 대한 나의 믿음이었듯, D-40일의 평온도 딸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앞으로 40여 일이 지나면 어떤 스토리든 우리의 삶에 기록될 것이다. 대입을 놓고만 본다면 합격의 문이 열리든 재수의 문이 열리든 한쪽이 열려있을 것이고 나와 딸은 그곳으로 들어가겠지. 삶이라는 궤적에선 뒤로 고침이 없으니 '팡'하고 도장 찍힌 팩트일 것이다. 그럼 환희 또는 슬픔이 그 순간을 채우겠지.
하지만 길게 보면 그 팩트는 인생의 작은 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니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인생 1회 차인, 아직 스무 살도 안된 내 딸이 인생 최대의 사건인 D-40일의 수능을 앞두고도 누릴 수 있었던 (비록 겉으로 보이는 평화일지라도) 평온을, 그 내공을 대견해할 수밖에.
물론 지금 당장 먹는 떡이 더 값지고 귀하게 느껴지겠지만, 인생이라는 긴 설계 앞에서 나는 우리 딸이 보여준 성실과 예쁜 마음, 그리고 담대함을 응원해볼까 한다.
그렇지만, 그래도 조금 더 으쌰으쌰 힘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