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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지 Oct 30. 2024

마지막 통학버스

버스 기사님 문자에 마음이 울컥해졌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문자홍수 속에서 이럴 때가 있다. 문자 창을 한참을 들여다보게 되는 그런 때. 매번 그러지는 않는데 감수성 제대로 폭발한 갱년기의 수험생 엄마라서 그런지 별 것 아닌 일에도 이렇게 울컥 마음이 요동치는 그런 순간이 있다.


"oo고 11월 통학비 안내

ooo원 ooo은행..


3학년은 마지막 입금입니다. 졸업 시까지 통학버스 이용 가능합니다.

그동안 감사드립니다.

학생들 수능 잘 보라고 기원합니다.

부모님들께서도 애 많이 쓰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말하자면, 뭐 특별할 것은 없는 문자였다. 이번 달 통학비 안내와 마지막 통학비라는 통보, 그리고 수능 잘 보라는 덕담들. 사실 '수험생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등등의 말들은 수능을 앞둔 이맘때쯤이면 누구나 건넬 수 있는 국민덕담에 가까운 말이지 않나. 그런데 이상하게 이 문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냥 통학비 안내만 해주셨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일이라서 그랬나.


워낙 학생들 등하교를 책임지고 계시는 분이다 보니 3년을 아침저녁으로 본 아이들에게 마음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분이지만 그 말 한마디로 내 마음 주변이 따뜻하고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3년 동안 안전하게 운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답신을 보냈다.


수험생 엄마로 살아본 일, 이 시기가 축복처럼 느껴지는 건, 이 시기가 어쩌면 겸손을 배운 시기이기도 한 때문일 것이다.


어제 사춘기 딸아이와 수험생 딸아이가 한밤중에 야식을 먹다가 한바탕 싸움이 났다. 무엇 때문인지도 몰랐지만 중요한 건 싸움의 이유가 아니라 한창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두 딸의 말싸움이 점입가경의 형태로 발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대로 두면 안될 것 같은 위기감 같은 게 문득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안 되겠다. 참견해야지.


원래 아이들의 싸움에 한쪽 편을 들면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 싸움에 깊게도 얕게도 관여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어제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일단 수험생의 예민함이야 그렇다 치고 사춘기인 둘째가 평소와 다르게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이었다. 아마도 숙제가 너무 많은 탓이었을 것이다. 둘째네 학교가 겨울방학 공사를 앞두고 있어 다른 학교보다 3주 정도 빨리 기말고사를 치르는 통에 학원의 정규수업과 내신수업을 동시에 듣게 되는 것이 문제의 시초라면 시초였다.


그렇지만 둘째의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엄마인 내 입장에서는 수능이 2주 남은 우리 고사미의 편을 들 수밖에 없지 않나. 나는 이 싸움의 중재에 나섰다. 물론 고사미의 편에서. 그러니 사춘기의 속을 뒤집어놓을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이 상황에서 엄마라는 존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딸들이라 '등짝 스매싱' 이런 건 불가능하니 그저 말로 제압하는 수밖에. 평소에 언성을 높이지 않는 편이라 단전에 힘을 주고 사자후를 질렀다. 그만들 하라고.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전에도 두 자매의 싸움은 늘 있어왔던 일이었고, 참다못해 아이들을 혼냈던 일이 없던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이번엔 너무너무 미안했다는 것이다. 내 입에서 나간 평소와 다른 언어들과 자식에게 차마 하지 못할 후진 언어들. 그 언어들을 고스란히 받았을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나에 대한 실망감이 뒤섞여 내 마음이 그야말로 진흙탕이 된 것 같았다.


그렇게 아이와 한바탕을 하고 나니 마음뿐만이 아니라 몸마저도 힘들어졌다. 마치 심한 노동을 한 후에 느껴지는 기진맥진함 같은. 갱년기라 그런가?


그뿐만이 아니다. 요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버거워서 사람 만나는 일을 자제하고 있는데, 요즘은 점점 누군가의 험담을 듣는 것이 힘들게 느껴진다. 자꾸 친구의 전화를 피하는 것도 그래서일 거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이었는데 왜 이럴까. 왜 자꾸 마음이 흙탕물이 되는 일이 점점 버거운 것일까.


그냥 단지 성격인 건지, 수험생 엄마라서 그런 건지, 갱년기라 그런 건지 정확한 이유야 모르겠지만 요즘 칩거 상태에서 침묵하고 기도하는 일이 내 생활의 주된 일상이 되어 그렇기도 할 것이다. 요즘 내 마음은 말 그대로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 말하자면 이너피스의 최절정이라.


마치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이 평소에 간이 안된 음식을 먹다가 갑자기 외식을 하게 되면 모든 음식의 맛이 자극적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내적 평화가 주는 편안함이 좋아지니 갈등상황이 예전보다 더 힘들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심리학에서 말하길, 노년기에는 긍정적인 정서적 항상성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고 이야기하던데, 아마도 내가 아이들의 싸움에 평소보다 괴로워했고, 통학버스 운전기사님의 문자에 마음이 따뜻해졌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나보다. 미운 말은 감당이 안되고 따뜻한 말 한마디에 감동받는 갱년기라서.


생각해 보니 내가 스무 살 무렵에는 드라마를 보지 않고 늘 다큐멘터리 같은 것만 틀어놓는 엄마를 희한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막장과 자극이 난무하는 드라마를 좋아하는 시청자로서 당최 무미건조한 방송들을 틀어놓는 엄마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 엄마의 나이가 되고 보니 충분히 알고도 남겠다.


나이가 들면 굳이 자극적인 드라마로 마음의 피로도를 높일 필요가 없으며, 남의 이야기를 보면서 흥분하는 일이 정서적으로 얼마나 소모적인 일인지 알게되는 진실의 순간이 온다는 사실을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따뜻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나쁘지만은 않은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요즘 갱년기가 거짓말처럼 훅 다가와서 놀라고 서글픈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인데, 놀라지 말자고 서글프지 말자고 스스로 다독여본다. 곧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아이를 키워낸 그 모든 순간이 무사했고 아름다웠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니까.


아, 그나저나 누군가는 그러던데. 나이 들수록 우울증이나 치매에 걸리지 않으려면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한다고. 무엇이 더 건강한 방법일까? 사람을 만나면서 다사다난하고 유쾌하게 사는 것과 고요히 이너피스를 지키며 긍정적 항상성을 지키는 것 중에. 하하.


그런데 뭐 인생에 정답이 어디 있나. 인생은 생각하기 나름이니 그때 그때 하고 싶은 걸 해야겠다. 중용을 지키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 일임을 또 한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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