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무슨 생각을 해요, 그냥 하는 거지."
'어쩌다 보니 고3엄마'
요즘 나의 정체성이다. 고3 엄마가 되었다는 중압감에 이 연재를 시작했는데, 수능을 코앞에 둔 지금에 와서 보니 고3이 되어도, 고3 엄마가 되어도 그다지 천지가 개벽할 일은 없는 것 같다. 다만 결전의 날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불편해지고 가끔 평정심을 잃는 정도(?)가 변화라면 변화랄까.
나 같은 경우에는 이른 갱년기가 벼락처럼 찾아왔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일단 내 몸에 여러 가지 증상들이 나타나다 보니 이게 갱년기의 증상인지, 고3엄마의 안절부절못한 마음에서 오는 증상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게 문제지만.
일단 나에겐 약간의 게으름이 찾아왔다. 원래 게으른 인간이었지만 그 게으름을 꾹꾹 누르고 그동안 잘 살아왔었는데 요즘엔 그냥 무한정 게을러지고 싶어 졌다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변화라면 변화다. 마음을 일으키려면 몸부터 일으키라는 말이 있던데, 몸이 무너지니 마음이 따라갈 재간이 없다. 어쩌면 내 마음은 원래 약해빠진 내 몸보다도 의지가 약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요즘 시기가 시기인지라 (수능을 코앞에 둔) 릴스나 숏츠에서 많이 나오는 영상이 일타강사의 동기부여 영상이다. (무슨 알고리즘으로 뜨는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요즘 성공하기는 너무 쉬워, 아무도 열심히 안 하거든."
"나중에 보면 20대에 벌어진 경험의 격차는 평생 극복이 안돼. 그만큼 20대가 중요해"
"지금 할 일을 안 하고 미루잖아? 그렇다고 그 일을 안 해도 되는 게 아니야. 나중에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든 상황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
"웃긴 게 뭔 줄 알아? 내가 전교 1등인데 도서관에서 내가 제일 늦게 나와. 내가 제일 열심히 공부한다는 거야."
등등등.
이런 영상을 보고 있으면 무기력한 나태와 싸우고 있는 갱년기의 나조차도 다시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데 아이들은 어떤 생각이 들까? 궁금했지만 싫어할까 봐 아이들에게 물어볼 엄두를 못 냈다. 안 좋아할 거라 짐작하는 수밖에.
하긴 뜨거운 물에 데어보지 않고서 뜨겁다는 걸 어찌 알았겠는가. 무릇 사람은 자기가 겪어봐야 뼈저리게 느끼는 법. 저런 동영상 하나로 동기부여가 되었으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스마트한 곳이 되었을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 일타강사들도 많은 실패의 경험을 겪고서 저 자리에 서있는 것이 아닐까?
그나저나 진짜 궁금하긴 했다. 갱년기 무력감에 몸부림치는 나도 저런 자극적인 동기부여 영상을 보면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데 아직 전두엽 말랑말랑한 아이들은 오죽할까 싶어서. 그렇지만 아니다. 그런 기대가 독약이다. 인간의 의지와 뇌가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가. 뭘 하고 싶은 충동이야 일겠지만 딱 3초 정도 유지될까? 그저 마음의 스파크일 뿐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영상들, 다 쓸데없단 얘기다.
그런데 요즘 이부자리 박차고 나오게 되지는 않지만,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살며시 눌러주는 영상이 있기는 하다. 바로 피겨스케이트 선수 김연아의 연습 동영상. '무슨 생각하면서 연습하세요?'라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김연아가 깔깔 웃으며 했던 말.
"생각은 무슨 생각을 해요, 그냥 하는 거지."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한다는 것,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거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일단 '하고 싶다'는 마음까지는 언감생심 아닐지라도 '무조건 하기 싫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더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기 싫다'라는 마음을 극복했다는 말이니까. 어쩌면 동기부여를 잘하는 사람보다 '하기 싫다'는 느낌이 적극적으로 들지 않는 사람이 결국에 위너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러고 보면, 어릴 때부터 받아온 질문들 중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에 나는 단 한 번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위인전을 읽으면 위인은 누구나 한 명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가지고 있던데, 나는 슬프게도 위인이 될 인물이 아니라 그랬는지 존경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마도 '존경하는 사람'을 '롤모델' 쯤으로 여겨서인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지 마더테레사를 볼 때도, 이태석 신부님을 볼 때도 그분들의 고귀한 희생 앞에 숙연해지긴 하지만 닮고 싶진 않았다. 나의 롤모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럼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은 누굴까. '저에게 롤모델이 누구냐 물으신다면' 요즘 나에게 약간 존경이란 단어를 쓰고 싶은 사람이 생기긴 했다. 바로 매일을 성실하게 사는 사람. 그야말로 '시크릿 오브 루틴'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하루도, 아무것도 하기 싫은 하루도, 컨디션이 나쁜 하루도, 정신건강이 심히 우려되는 그런 하루도 매일 빼먹지 않고 '그냥 하는' 일의 효과가 얼마나 찬란한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깨달음을 깨알같이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지만 이것도 참아야지 싶다.)
요즘 나는 갱년기를 맞이하여 하루가 다르게 나오는 뱃살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심각한 무기력증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운동화를 신게 된다. 이건 아마도 4년을 매일같이 달려서 얻은 루틴의 힘일 것이다. 그뿐인가? 이렇게 해서 어느 천년에 늘려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영어공부는 또 어떻고. 그런데 이것도 그냥 욕심 없이 교재를 편다. 어차피 안될 거, 욕심을 내려놓으니 부담 없이 한 줄이라도 읽게 된다. 또 있다. 매일 밤마다 두 시간씩 백일기도를 가는 게 가능할까 싶었지만 '힘들면 빠지지 뭐' 하고 시작하니 벌써 끝을 향해 달려간다.
어쩌면 루틴을 지킨다고 해서 오늘의 나보다 더 나은 내일의 내가 되기를 바라는 것도 욕심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내가 오늘을 사는 일, 사소한 루틴을 지켜가는 일은 엄청난 결심으로 하는 일도 아니지 않나. 오히려 마음을 굳게 먹었다면 할 수 없는 일. 다만 먼 훗날 내가 이 시절을 돌이켜 보았을 때 세월을 낭비했다 여기지만 않게 된다면 만족할 것 같다.
그런데 마냥 힘 빼고 '그냥' 산다고 꼭 다 좋은 건 아닌가 보다. 오랜만에 남편대신 고사미 첫째의 일요일 라이드를 하게 되었는데 이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힘 빼고 생각 없이 운전하다가 고사미의 학원을 지나쳐버리고 만 게 아닌가. 내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둘째가 다니는 학원. 흑흑. 말없이 자기 학원을 지나쳐 유유히 운전하는 엄마를 보며 황당했을 큰 아이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엄마 머릿속에는 뇌가 없지?"
어머나! 내가 학원을 지나친 것도 문제지만, 평소 험한 말 따윈 입에 담지 않는 우리 고사미 입에서 저런 막말이 나오다니? 그것도 저리 다정하게? 내 잘못은 생각 않고 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고사미가 억울한 표정으로 내뱉는다.
"아니~~~!! 엄마 머릿속엔 내가 없다고!!"
아하! 뇌가 아니라 내가 없다고? 너무 기가 막혀 깔깔 웃고 말았지만, 이건 아무래도 요즘 하도 생각 없이 힘 빼고 '그냥 살자'에 꽂혀있다가 일어난 일인 것 같았다. 목적지 정도는 생각하고 운전했어야 했는데. 그러니 무엇이든 과유불급 아니겠나. 생각도 '적당히' 없자,라고 다짐해 본다.
"뭐든 '그냥' 합시다! 다만 부작용 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