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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Apr 14. 2024

아이가 임대아파트 사는 친구한테 당했다

편견과 선입견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나

사람은 직접 당해보지 않고는 모른다. 알 길이 없다. 아무리 공감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내가 직접 그 상황에 처해보지 않고는 완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어느 고급주거단지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 근처 임대아파트에 사는 어린이들은 출입금지시켰다는 기사를 봤을 때 사람들이 참 저렇게나 무자비할 수가 있나 싶었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그 고급아파트 주민의 집단 이기심에 대해 속으로 비난했다.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까지  우리 아이들 사는 세상이 각박해서야 되겠냐 하면서.


지인의 딸이 학교에서 친구에게 뺨을 맞았는데, 그 아이가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였고, 여차저차 사정으로 결국 임대아파트가 없는 부촌 아파트 단지로 무리해서 이사를 하고 전학을 감행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뺨을 때리는 폭력을 행사하게 된 그 친구에게도 어떤 사정이 있었겠지,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앞뒤 상황이 있을 것이고, 결론만 접하게 된 입장에서 뭐라 왈가왈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학군지 내에서도 임대아파트를 끼고 있지 않아서 오로지 자가 단지의 아이들만 배정받을 수 있는 초등학교 근처의 아파트 거래가가 부동산 침체 속에서도 고공행진을 할 때에도. 그렇게 까지 해서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할 수 있는, 청정수 같은 초등학교에 보내고싶을까,하는 생각과 사람들 참 한심스럽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아이가 놀이터에서 부쩍 어울리게 된 친구가 우리 단지가 아닌 근처 임대 단지에 산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전혀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색안경을 끼지 않기위해 노력했다는 편이 더 맞다.



사람마다 각자의 사정이 있고, 처한 환경이 다르기에 지금 현재 조금 더 어려운 형편이라고 해서 그걸 바탕으로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된다고, 그것도 어린아이는 더더욱 그런 세상에서 정해놓은 외부적 기준에서 바라보면 안된다고, 세상에서는 네가 사는 곳이 너를 말해준다고 하루가 다르게 외쳐대지만, 그래도 어차피 오십보 백보 우리는 다 같은 서민층일뿐이고 그 안에서 약간의 격차가 나는 것뿐이라 여겼다.



자가에 살아도 대출 껴서 버는 돈의 상당을 은행에 갚느라 허덕이며 사는 사람이 나를 포함해 대부분이다.

나 스스로도 부족하고 허점 많고 결점 투성이인 인간인데 내가 뭐라고 남의 사는 곳을 두고 그걸 바탕으로 판단하고 자시고 할 자격이 있냐고, 겪어보면 다 거기서 거기 인간이란 다 비슷한거라고 단정지었다.



내가 직접 겪어보기 전까지는.

아니, 적어도 내 아이가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아이와 한번씩 놀아주는(?) 그 친구가 그래도 고마웠고 나름 잘해주려 애썼다. 그 친구가 우리 단지에 살든 아니든간에 상관없이 다른 친구에게 대하듯 내가 배려해줄 수 있는 한에서 잘해줬다. 그조차도 따뜻한 친구 엄마라는 내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서라는 다소 불순한 동기가 있었을지는 모른다고 한다면,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순전히 동기는 사회성 부족해서 친구 사귀기 힘들어하는 아이를 위해서였다.



아들이 그 친구랑 하루가 멀다하게 노는데 걱정이라는 동네 엄마에게도 그래도 걔 알고보면 예의도 있고 착하다고 쉴드 쳐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헛웃음만)



놀이터에서 그 친구랑 노는 모습을 한두번 본 남편이 좀 안좋은 소리를 했을때에도 임대아파트라는 선입견가지고 보는거 아니냐고, 걔 착한 면도 있다고 애들이 다 크는 중인데 어떻게 다 완벽할 수 있냐고 실수하면서 크는거지 걔가 우리 애랑 어울려주는것만 해도 나는 감사할 지경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던 내가 참으로 우습게도, 아이가 그 친구에게 당하고 나니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얄궂게도 “임대아파트 사는 애라 그런거 아닌가.“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무척 부끄럽다. 우리 나라에서 임대, 자가, 전세 등을 따지는 행동은 미국에서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는것만큼이나 금기시되어있다. 속으로는 궁금할 지언정 절대로 입밖에 내서는 안되는 사회적 약속이다. 그런 걸 대놓고 운운하는 사람은 무식하고 교육을 못 받아서 그런거라는 의식도 있다.



그 친구가 사는 곳은 제쳐두고, 내 아이에게 가한 말과 행동만 가지고 판단하고 평가해야하는데 안타깝게도 일을 당한 직후 바로 내 머리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그 아이가 사는 아파트에 대한 것이었다. 이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이 무척 부끄러웠다.



결국 너도 어쩔수 없는 저속한 인간이야. 남과 다를바 하나없어. 도덕성? 그것도 다 상대적인거지. 네 새끼가 상처 안받는게 우선이지. 네가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지혜를 쌓고 교양을 쌓은다한들 아무 소용없어. 그럼 뭐해? 네 자식 일 앞에서는 결국 이기적인 밑바닥이 여지없이 드러나잖아. 너도 결국 당하고 나니까 이사 가고싶고 피하고 싶고 그 친구랑 되도록 안 어울렸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게 들잖아. 너는 그정도밖에 안돼. 윤리의식, 도덕성, 공정성 너하고는 거리가 멀지 너는 지금 네가 의식하는 그 생각 딱 그 수준이야.



그러면서 이전에 내가 듣고 봤던 각종 이야기와 말들이 머릿속에 파바박 모조리 떠오른다. 그리고 차츰 서서히 이해가 간다. 왜 사람들이 그토록 무리하면서까지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할 수 있는 동네로, 학교로 모여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지. 왜 특정 지역 집값만 비정상적으로 계속 상승하는지.



아이가 일을 당한 날밤부터 며칠 동안은 충격에 휩싸여서 정신을 못 차렸다. 자꾸 그 친구의 말과 행동과 내 아이를 무시하는듯한 눈빛이 떠올랐다. 내 아이를 생태계 먹이사슬의 가장 하위에 위치한 개체로 업신여기는듯한 그 말투와 눈빛이.. 어른 앞에서는 순수한척 자기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표정으로 아무말이나 둘러대는 그 얼굴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라서 나를 괴롭혔다. 아무리 자라나는 아이라지만, 성장하는 아이라지만 어린애가 어쩜 그렇게 약아빠졌을수 있는가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며칠간은 너무 화가 나고 손이 떨리고 분이 나고 억울하고 곱씹을수록 열받고 분통이 터져서 가슴이 쉴새없이 두근두근 뛰어서, 미칠것만 같았다.


보통 아이 친구들에 관한한 사소한 일들은 지인이나 동네 엄마들에게 털어놓기도 한다. 이상하게 그런 일들은 이야기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구체적인 해결안이 없어도 저절로 마음이 풀리게 되는 마법이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남편 이외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용기가나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에 내가 그 친구가 사는 단지 이야기를 꺼내게 될까봐, 내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까봐 무섭고 두려웠다. 속으로만 생각해야하는게 있지, 대놓고 말하지 말아야하는 그런것들..



며칠 속앓이를 했다.

엉뚱하게도 교회 예배시간에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눈물이 나왔다. 예배말씀은 내 마음속 사정과 전혀 다른 주제에 관한 것이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기본적인 가르침도 못 지키는 주제에 교회랍시고 나와서 찬송드리고 두손모아 기도하는 내가 못견디게 부끄러웠다.



물론 말과 행동으로 내비친 것은 아니지만 마음 속으로 금기시되어야할 생각을 품었다는 죄 때문에 무척 괴로웠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누군가에게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몸부림치며 외쳐대고 있는 그 저질스럽고 천박한 생각들을 다 토해내고 싶어서 돌아버릴것만 같았다.



울면서 하느님께 고백했다. “용서해주세요 저라는 인간은 이 정도밖에 안되네요. 부끄럽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고 주앞에 평등한데 아무것도 아닌 제가 왜 이딴 추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걸까요. 자식을 키운다는게 너무 힘드네요. 추악한 내 밑천이 다 드러나는것 같아서, 인성과 도덕성이라는 미명하에 꾹꾹 눌러두었던 감정들이 터져나올것만 같아서 견디기 힘들어요.”


아직도 나와 아이는 이 일을 극복하지 못했다. 아니, 의외로 직접 일을 당한 아이는 금세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내가 극복을 못하고 있다. 그 친구를 우연히 보면 나는 어떤 표정으로 대해야할지 모르겠다.


사람이 편견없이, 순수하게 그 사람 자체만을 바라본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한테만 이렇게까지 힘든건가.. 나는 아직 멀었나보다.




*순전히 제 개인적인 경험에서 쓴 글입니다. 어떤 분들께는 보시기 불편한 부분도 있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 너무 솔직한 글은 비판의 대상이 되더군요. 불편하셨을 분들께 미리 사과드립니다. 제 한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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