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첼쌤 Apr 23. 2024

집 나가 고아원에나 가서 살아

최악의 말을 해버렸고

얼마 전 아이가 놀이터에서 친구에게 무차별적인 언어폭력을 당한 일에 분개했다. 그로 인해 아이도 상처받았고, 아이만큼이나 나도 그 일을 극복하지 못하고 힘들어했다. 내 아이가 또래관계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고 상처받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나는, 실제로 눈앞에서 그런 장면을 목도하고 가슴이 아파 무너져 내려서 내리 며칠을 끙끙 앓았던 나는, 참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에게 그에 범접하는 언어폭력을 행사했다.


말로써 아이에게 겁을 주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안된다는 일은 안 되는 줄 알아야 하는데,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엄마에게 똑같은 요구를 하고 안 되는 건 안된다는 내 합리적 설명은 깡그리 무시한 채, 징징대고 떼를 쓰는 아이가 견디기 힘들었다. 이제 좀 그만했으면 하는 순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없이 징징댐이 이어졌다.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평상시보다 더 인내심 용량이 적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남편과 사이가 안 좋아서 말도 안 하고 있던 터라 내 기분과 감정도 그다지 부정적인 스펙트럼에 더 가까운 상태였다.



급기야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나중에 몇 년 후에 해준다니까 왜 계속 안되는 걸 해달라고 해, 왜 말을 못 알아듣냐고..!!$$%^&*()*&!@"



더 이상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이나 설득 따위 통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머리에 꽂힌 순간, 막가파로 나가는 나를 발견한다. 이성의 끈은 너무나 쉽게 끊어진다. 그리고 아이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죄책감을 느낄 새도 없이 쏟아내고 만다.



"그럴 거면 너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거 다 해주는 엄마랑 살아, 나는 그렇게 못해주니까.

짐 싸서 나가. 니 요구 다 들어주는 부모 찾아서 나가든지, 안되면 고아원 가서 살아.

더 이상 힘들어서 너 못 키우겠다."



겁먹은 아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짐가방까지 들고 와서 아이 옷을 몇 개 대충 집어넣으면서 협박적 행동까지 더했다. 울면서 다시는 떼쓰지 않겠다고 짐가방 싸지 말라고 나를 말리는 녀석이다. 내가 하는 협박이 좀 통한다는 생각이 드니까, 이 정도 했으면 그만둬야 하는데 더 겁박하고 싶은 욕구가 올라온다.



취조실에서 일하는 직원은 죄 없는 사람에게 가학적인 물고문, 신체고문을 가하고도 집에 가서는 자녀들에게 한 없이 좋은 아빠일 수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죄의식은 뒤로하고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그것도 나보다 힘없고 약한 인간에게.



불현듯 어렸을 적 기억의 한 순간이 소환된다. 아빠랑 싸워서 사이가 안 좋을 때면, 친정 엄마는 너희 아빠도 싫고, 너네들 데리고 살기 힘드니까 고아원에 가서 살아라고 했다. 자주는 아니었다. 아주 가끔 극도로 사이가 나빴을 때 엄마는 그런 말을 하곤 했다. 어린 마음에 나는 겁을 잔뜩 집어 먹었다. 오빠에게 고아원은 어떤 곳이냐고 물어봤다. 오빠는 그런 나를 철부지 취급했다. 무서웠다. 정말 엄마, 아빠가 우리를 버리면 고아원에 가야 할까 봐서.



부모로서 나만의 몇 가지 기준은 있었다. 아이에게 완벽한 엄마는 못되더라도, 내가 어렸을 때 부모에게 상처받았던 그 말과 행동들 몇 가지는 하지 말자는 기준. 나는 내 부모보다 여러 가지로 나은 사람이고, 육아서도 많이 읽었고, 엄마로서 더 노력하고 있으니까 충분히 더 나은 부모가 될 거라고 자신했다.



그런데 이번 일을 치르고 보니 나는 내 부모님보다 하등 낫을 게 없는 인간임을 깨닫는다. 결국 아이는 내 협박에 못 이겨 다시는 그 일에 관해서 떼쓰지 않기로 약속을 했고, 반성문을 썼다.



감정의 쓰나미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 다시 평정을 되찾았을 무렵 아이가 나에게 다가와서 묻는다.



"엄마, 고아원은 어떤 곳이야? 누구랑 살아야 되는 곳이야?"


"....."



아마 고아원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했어서 궁금했던 것 같다. 어쩌자고 이런 식으로 그 단어를 알려주게 된 걸까. 엄마로서의 자존감이 또 바닥을 친다.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엄마다.



지금은 아직 어리니까 이 정도의 협박이 어느 정도 통할지 모르겠지만, 더 나이가 들고 성장하고 등치마저 나보다 더 커지는 순간이 온다면 이런 충격요법도 통하지 않을 텐데.. 나는 부모노릇을 잘할 수 있을까? 아마 오은영박사님이라면 아까 그와 같은 상황에서 훨씬 더 능숙하게 잘 대처하셨겠지.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건 사랑만으로는 안 되는 것 같다. 때로는 강단 있는 훈육도 필요하고 엄격한 통제도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언어적 학대가 되지 않을 만큼의 적정 선을 지키면서 핵심만 정확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막상 상황에 처하면 아무런 생각이 안 나는 것이다. 김붕년 교수님이 자녀를 잠깐 우리 집에 머물다 가는 손님처럼 귀하게 대해주라고 했는데..


아무리 화가 나도 '고아원' 언급은 하지 말기로 하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이미 아이는 상처받았을 수 있고 그 어휘가 머릿속 깊이 부정적 단어로 내재화돼버릴지도 모르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게 내 배에서 나온 자식 앞이라 할지라도. 한 번은 실수였다고 치자. 두 번부터는 내가 나를 용서하지 말아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운동회는 누구를 위한 날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