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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Jun 28. 2024

홀가먼트 롱원피스를 벗고 싶어졌다

흰 티에 청바지가 입고 싶은 이유

여름에 제격인 쉬운 여자 코디 중 하나는 바로 원피스 패션이다. 훌러덩 하나만 걸치면 되니 입고, 벗기도 간편하고 땀나기 쉬운 무더운 여름에 최대한 더위를 피할 수도 있고 세탁도 쉬운 편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원피스란 화려한 프릴이 달린 플라워 패턴의 페미닌 한 디자인이나, 오피스룩에 제격인 벨트가 달렸다거나 딱 핏 되는 디자인의 원피스가 결코 아니다.


내가 말하는 원피스는, 지금 당장 아파트 단지를 나서면 흔히 볼 수 있는 원피스를 지칭한다. 등하원룩이라고도 불리는 애엄마들이 즐겨 입는 원피스 디자인은 정해져 있다. 펑퍼짐하고 헐렁하면서 허리라인이 강조되지 않아서 몸매 커버에도 좋고 무릎 훨씬 아래까지 내려와서 노출에 크게 신경 쓸 필요도 없는 그런 원피스를 말한다.



언제부터 이런 디자인이 유행이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아이를 낳아 키우기 시작할 적부터인가. 아무튼 홀가먼트 소재라는 이름으로 이런 디자인의 원피스나 편한 투피스 세트들을 엄청나게 팔았다. 나도 시대에 흐름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사댔다. 사실 가격적인 면에서도 전혀 부담이 가지 않았기에 더 편하게 살 수 있었다. 소재의 차이가 얼마나 클지는 몰라도 잘 찾으면 삼사만원 선에서도 여름 홀가먼트 니트 옷들은 쉽게 살 수 있었다. 택배비 아끼려고 여러 벌 사서 양가 엄마들에게 선심 쓰듯 선물해주기도 했다.



대체 홀가먼트가 뭐길래 여성옷 쇼핑몰에서는 이 원단이 홀가먼트임을 그렇게 강조하는지 궁금해졌다. 알고 보니 영어 단어 whole garment였는데, 말 그대로 다른 문양이나 선 없이 실 하나를 사용해서 통으로(?) 만들어지는 그런 옷을 가리켜서 지칭하는 말이었다. 홀가먼트 소재가 뭔가 대단한 하나의 브랜드인 것처럼 광고하는 쇼핑몰도 많았는데 그냥 심플하고 단순한 한 가지 색상으로 이루어진 옷이라고 보면 된다.



어느새 내 옷장은 펑퍼짐하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디자인의 옷들로 가득 찼다. 아가씨적에는 정말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길이의 치마는 입어본 적도 없었는데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 건지 그런 옷은 아이 데리고 다니면서 입기에는 너무나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웠다. 그리고 왠지 애엄마라는 내 정체성에도 안 맞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아주 가끔 기분 내고 싶을 때 아가씨 적 옷들을 꺼내 입기도 했지만 자주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디자인의 옷을 특별히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남편이다.

여름에 이만큼 쉽고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이 또 없는데, 남편 눈에는 그런 원피스가 꼴 보기 싫은 눈치였다.

어느 날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원피스 안 입으면 안 되냐? 프란체스카 같아.."



프란체스카라니? 더욱이 그날 입은 원피스가 검은색도 아니었는데 상큼하고 밝은 색깔의 플리츠 소재 원피스였는데 무슨 프란체스카라니 헛소리야.



"왜? 이 옷이 그렇게 꼴 보기 싫어?"


"어. 좀.. 별로야."


평소에 내 옷차림에 대해 자주 지적하지는 않는데 굳이 나서서 말했다는 것은 그만큼 별로였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보통의 남자들도 이런 스타일의 원피스를 싫어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들의 패션 취향을 들을 일은 거의 없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 역시 이 원피스들이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몸매를 여지없이 가리는 헐렁한 그 디자인이 내 몸이 부끄러워 가리기 급급하다는 느낌을 주어서일까.


매일 아침 일어나서 운동 유튜브를 켜놓고 덤벨 운동을 시작한 지 반년째인데 내 몸에도 은근한 변화가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 변화는 아주 미미하고 지극히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정도라서 어디 대놓고 자랑할 수는 없는 정도다.


몸무게가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어서 덤벨 유산소 운동을 한다고 살이 빠지지는 않는다는 걸 알았다. 대신 먹는 것에 비해 그나마 유지는 되는 중이고, 체중 자체를 떠나서 내 눈으로 보기에 뭔가 라인이 잡혔다고 해야 하나, '탄탄한 몸매'다라고 부르기엔 어처구니없을지 몰라도 전에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도 없었던 '탄탄함'이 내 몸에서도 조금씩 느껴졌다.


엉덩이에는 살이 하나도 없어서 치욕스러운 납작 궁둥이어서 늘 어떤 코디를 하든 힙을 가리는 것을 우선시했는데 어느 날 보니 내 뒷모습이 전처럼 납작해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 기분 탓이겠지 싶었는데 나의 물음에 남편도 마지못해 전보다는 좀 나아진 것 같다고 소극적인 답변을 했다.


아무튼 피곤한 날 빼고는 매일같이 유튜브 속 날씬하고 탄탄한 언니를 따라 오랑우탄처럼 둔중한 몸짓으로 따라 하느라 바빴던 내 노력이 아무 쓸모없는 짓은 아니었던 것이다. 근육량이나 체지방을 측정해 본 것은 아니고 순전히 나 혼자 느끼는 변화일 뿐이지만.


계절이 바뀌면서 옷장에 있는 여름옷들을 꺼내놓으면서 봤더니 생각보다 내 옷장에는 롱원피스들이 즐비했다. 대다수가 아무 문양도 패턴도 없는 홀가먼트 원피스들이었다. 언제 이렇게 많이 샀는지 무채색 톤이 색깔별로 꽤 여럿이 눈에 띄었다.


갑자기 입기 싫어졌다. 그런 디자인에 질린 탓도 있겠지만, 남편의 프란체스카 언급도 있었고, 또 조금은 탄탄해진 내 몸뚱이를 다 가리는 디자인을 굳이 입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또 한 가지 결정적인 건 아줌마(?)로 보이기 싫었다. 40대 되고도 아줌마라는 단어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싶은 나는 한 살이라도 어려 보이고 싶은 철부지인지도 모른다. 홀가먼트 원피스는 애엄마들의 대명사라고 해도 될 정도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많이 입는 옷이다. 나는 이제 애엄마라 부르기에도 머쓱한 명명백백 초등맘이 되었는데도, 되려 더 젊을 적 어린 아기 엄마였을 때 입은 옷들을 거부하고 싶은 것이다.


요즘 내 눈에 들어오는 스타일은 바로 흰 티에 청바지다. 이 조합을 안 입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즐겨 입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청바지가 잘 어울리려면 무엇보다 매력적인 힙라인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나는 자주 즐겨 입지는 못했다.


그랬던 내가 운동 좀 했다고 갑자기 청바지가 입고 싶은 것이다. 청바지에 어울리는 상의는 뭐니 뭐니 해도 심플하고 깔끔한 흰 티가 아니겠는가.


남편에게 반항이라도 하듯 다음 날엔 야심 차게 흰색 티와 청바지를 꺼내 입었다. 아직은 힙을 다 드러낼 만큼 자신은 없으니 긴 티셔츠로 엉덩이 쪽이 절반 정도는 가려졌는지 꼭 확인한다.


이런 나를 보고  남편의 한 마디.


"너 대학생처럼 보이고 싶어서 이렇게 입은 거야?"


"... 내가 이렇게 입는다고 대학생은 무슨 대학원생도 못 되는 나이 아니야? 교수님이면 몰라도."


아.. 나는 벌써 교수님 나이가 돼버린 건가. 뭐 정확히 말하면 교수님은 아니더라도 오래 근무한 시간강사급이 아닐까 싶지만.



남편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요즘 계속 흰 티에 청바지 패션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오늘 아침에는 옷장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홀가먼트 롱원피스들을 외면한 채 청바지를 꺼내 들었다. 원피스 중 몇 개는 친정엄마 주려고 챙겨놨다. 어차피 프리사이즈라서 나랑 체중 차이가 나는 엄마가 입기에도 무리가 없는 디자인이다. 한 번 정 떨어지니까 다시는 입고 싶지도 않은 게, 홀가먼트 원피스가 되어버렸다.


왜 갑자기 흰 티와 청바지 조합에 끌렸는지는 모른다. 몸매에 자신감이 생겼다면 딱 붙는 원피스도 입을 수 있고 짧은 반바지나 치마, 나시도 시도해 볼 수 있겠지만 그런 것들은 정말 2,30대 MZ 세대들을 위한 패션 아닌가.


김미경 강사님은 요새 나이에서 17살은 어리게 사는 게 트렌드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40에서 17살을 뺀 23살의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생각하는 적당한 선은 본인 나이에서 6,7살 정도 젊은 마인드로 사는 것이다. 수십 년 전의 서른 살과 요즘의 서른 살은 전혀 다른 이미지로 다가오는 건 사실이니까.


몇 살까지 청바지에 흰 티를 입는 게 가능할까. 욕심 같아선 이탈리아의 멋쟁이 길거리 모델들처럼 환갑의 나이에도 멋지게 청바지와 흰 티, 그리고 컨버스를 소화하고 싶다. 주름진 얼굴과 흰머리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일까? 쓸데없는 걱정일랑 제쳐두고 매일 꼬박꼬박 빼먹지 말고 운동이나 열심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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