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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Aug 17. 2024

내가 없으면 집이 안 돌아갈거란 착각

느린 아이 키우며 일하는 엄마

관성이라는 게 참 무섭다. 한 번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 적응하게 되면 거기서 변화를 시도하기란 참 어렵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물론 있겠지만 나는 그런 특별한 사람은 아닌 관계로 관성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지 못했다.


아이 치료라는 매우 합당한 사유로 한 번 휴직을 시작하니 나도 모르게 그 생활에 젖어들었다. 계속해서 연장에 연장을 거듭하게 되었다. 일 년 죽어라 내가 노오력만 하면 뭔가 아이가 짠! 하고 탈바꿈될 줄 알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기 계발 인플루언서들이 시키는 대로 미라클 모닝을 하면서 백번씩 아이가 완치될 거라는 꿈을 글로 써붙이기도 하고 시크릿을 시전 하면서 아주 선명하게 눈을 감고 그런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지만 현실은 가차 없었다.


일 년으로는 부족했겠다는 생각으로 계속해서 휴직을 연장하고 전업주부로 아이와 남편만을 케어하는데 온 집중을 다하며 살기를 몇 연차 지속하다 보니 나는 지쳐버렸다. 내가 어떤 노력을 퍼부어도 아이가 완벽하게 좋아질리는 없고 어차피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집에 있음으로 해서 아이가 더 눈에 띄게 나아진다는 확률이 보장받을 수 없다는 걸 절감했고, 그 시점에 슬슬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남편은 아직 완전히 좋아지지 않은 아이를 볼모 삼아, 그리고 자신의 내조를 지금처럼 계속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에게 계속 집에 있어주기를 요구했다. 내가 없으면 도저히 우리 집은 굴러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매일같이 성토를 하면서 어필했다.


하마터면 가스라이팅 당할 뻔했다. 정말로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될 거라는 생각을 하고 만 것이다. 아이가 더 어렸을 적에도 보육기관에 보내고 이모님을 쓰면서도 몇 년간 직장생활을 했음에도, 그때에 비해 훌쩍 아이는 컸지만 초등학생이라는 손이 많이 가는 시기에 발달 문제까지 겹친 아이는 더욱 내 발목을 잡았다.


내가 없으면 아침밥을 누가 챙겨주고, 약 복용은 어떻게 시켜.

내가 없으면 하교 시간에 누가 봐주고, 학원은 어떻게 데려다줘.

내가 없으면 학원과 센터 중간에 비는 시간에 어떻게 애를 집에 혼자 방치해.

내가 없으면 오후 간식은 누가 챙겨줘.

내가 없으면 남편 식단 관리는 어떻게 해.


한 마디로 내가 없으면 집이 엉망진창이 될 거라는 생각이 나를 강하게 지배했고, 정말 직장을 그만두는 것만이 답인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진실은, 내가 없다고 해도 집이 굴러가지 않는 게 아니었다. 가족들과 일상은 어떻게든 굴러간다. 비록 내가 집에 있을 때만큼 모두가 편하게 별 고민 없이 지내지는 못한다. 아이도, 남편에게도 약간의 양보와 희생은 요구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점심밥을 선뜻 챙겨준 동네 엄마나 방학에는 아예 데리고 가서 봐주신다는 친정이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없었다.


그간 가족을 위해 고민 없이 제공한 나의 시간과 노력이라는 노동으로 인해 일상에 어떠한 균열도 없이 스무스하게 흘러갔다. 이제는 그런 편한 일상은 다시 가지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아이는 혼자 간식을 챙겨 먹기도 해야 하고, 학원 사이에 빈 시간에는 혼자 집에 있기도 해야 한다. 심지어 센터 치료도 혼자 받으러 가야 한다. 남편도 그전처럼 나에게 건강식단을 제공받기가 어려워졌고, 가끔 도와주던 일도 해줄 수 없게 되었다.


비록 전처럼 술술 굴러가지는 않더라도, 터벅터벅 이리저리 부딪히고 멈췄다가 다시 돌아가는 수레바퀴처럼 더 느린 속도라도 우리 집의 일상은 굴러가기는 한다. 엄마와 아내라는 의무에 겁 없이 불나방처럼 뛰어든 여자가 일을 하면서 워킹맘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주변에 보면 아예 친정이나 시댁에서 같은 단지에 살면서 전적으로 도움과 지원을 받으며 일하는 여자들도 있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감수해야 하는 스트레스는 존재할 거라고 생각한다.


직장에 다시 돌아가기 전에 자주 생각했다.

나만 그만두면,

나만 포기하면,

나만 희생하면,

가족 모두가 편해지지 않을까.


이제 그런 생각은 과감하게 거두기로 했다.

내가 그만두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가족에게 덜 희생하기로 결심하면서 얻는 경제적 이득과 내 삶을 이끌어간다는 주도성이 나를 살게 하는 큰 원동력이라는 걸 긴 시간 깨달았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완벽한 가정을 이끌어갈 자신도 없다.

어차피 아이는 타고난 발달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기에 처음부터 뜻을 품고 완벽한 자녀 교육을 시도해 볼 기회조차 없었다.

완벽한 직장인이 될 자신 또한 없다.


그렇지만 매 순간에 집중하면서 애쓰고 노력하는 엄마, 아내, 그리고 직장인은 될 수 있다고 본다. 최선의 노력을 다해버리면 번아웃이 오게 마련이다. 완벽에 가깝지 않더라도 괜찮다. 나는 처음부터 잘난 사람도 아니었고 완벽한 사람도 아니었다는 걸 인정하면 간단하다.


당분간 적응하느라 다들 힘들겠지만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접어두기로 한다.

좀 뻔뻔해지더라도 부탁도 당당하게 하고, 도움 받을 수 있는 건 받자.

나 혼자서는 도저히 직장과 살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없다. 어차피 도움은 받아야 한다.

진심으로 감사를 표시하고 합당한 보답을 해주면 그만이다.

걱정말자. 우리 집을 잘 굴러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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