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첼쌤 Sep 14. 2024

통장잔고는 자존감과 비례해서

내가 다시 일을 시작해야만 하는 이유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는 말은 거짓이다. 돈은 물질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명상살인>


몇 년째 무급휴직을 해 본 경험에 비추어 조언하자면, 무급휴직은 정말 추천하지 않는다. 말이 무급이지 월급만 안 나오는 게 전부가 아니다. 무급휴직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건강보험료와 연금기여금을 납부해야 한다는 사실을 꼭 알아야 한다. 다른 직장은 잘 모르지만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근무자에게는 보통 다 해당되는 것 같다.


휴직 초기 처음 한 두 번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냈는데, 그 후로는 애써 외면하면서 지냈다. 나중에 복직하게 되면 천천히 갚지 뭐 하는 생각으로 그냥 버텼고 내 기억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전에 장기 육아휴직을 마치고 돌아갔을 때에도 거의 2년 동안은 미납부된 기여금은 월급에서 공제하느라 안 그래도 박봉인 월급이 더 초라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그럴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아이한테만 집중하자는 마음으로 그냥 무시하고 지냈다. 얼마가 됐든 나중에 일을 하게 되면 그때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몇 달 전 연금관리공단에서 알림 문자가 왔는데, 너무 충격적이라서 두 눈을 의심했다. 그간 미납된 금액을 고지해 주고, 지금 납부하면 현재 물가를 기준으로 납부할 수 있는데 나중에 복직 후 납부하게 되면 인상된 금액으로 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대체 얼마나 인상되기에? 그냥 무시하고 싶었는데 확인이나 한 번 해보자 싶어서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가서 기억도 안나는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겨우 찾아내서 체크해 보았다. 미납된 금액을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한 달에 거의 50만 원 돈이 청구되고 있었고.. 이게 몇 년 동안 쌓이니 뭐 거의 이천만 원에 가까운 금액이 책정되어 있었다.


그것도 지금 내면 그 정도지 나중에 복직하고 납부하게 되면 더 인상된 금액을 내야 한다는 게 또 하나의 충격이었다. 계산해 보니 금액차도 은근히 커서 백번 생각해도 지금 내는 게 더 이득이었다.


이 큰돈을 어떻게 마련하지.. 고민을 했다.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냥 나중에 월급 받을 때 할부금 갚듯이 공제시키는 게 나을까. 안 그래도 이미 통장잔고는 바닥인데 이 큰돈을 한꺼번에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혼자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남편에게 말을 꺼내보았다. 이 인간이 과연 내준다고 할까? 누구보다 내 복직을 반대하고 있고, 본인이 좀 힘들더라도 기꺼이 외벌이를 감수할 테니 제발 너는 아이 케어에만 집중하라고 하루가 다르게 가스라이팅하는 사람인데 이 큰 금액을 내주면서까지 휴직을 이어가라고 할까? 만에 하나 내가 당장 퇴사하더라도 이 돈은 어찌 됐든 빚과 같은 개념이라서 내긴 내야 한다.


역시나 남편은 금액을 듣더니 애써 모르는 척하는 눈치였다. 나중에 복직해서 갚는 방법도 있다고 말했더니, 별생각 없이 그렇게 하든지 아예 퇴사하고 나오면서 그때 고민하든지 하라는 식이었다.


본인 일이 아니니까 이렇게 무심하구나. 결국 내가 고민하고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아마 이때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정말 다시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내가 억지로 쉬고 싶어서 쉰 것도 아니고, 일하기 싫어서 돈 벌기 싫어서 휴직을 이어간 것도 아닌데 그 기간에 어쩔 수 없이 쌓인 연금납부금을 가지고 왜 나 혼자 책임지고 고민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천만 원이 아니라 이백만 원이었어도 남편은 내준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을 것 같다. 통장에 그만한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내주어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는가 보다.


한참만의 고민 끝에 중간해지하고 싶지 않았던 이런저런 명목의 예금과 푼돈들을 끌어모아 일시금으로 납부는 했다. 그 돈을 내면서 얼마나 마음이 쓰리던지. 장기 휴직했던 친구한테 물어보니 자기도 한꺼번에 내려면 부담돼서 처음부터 그냥 매달 자동납부를 신청해놨다고 한다. 아, 정말 현명한 방법이구나. 그런 방법도 모르고 이 지경까지 왔으니 내가 생각해도 참 답답하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번에 납부한 금액은 지금까지 밀린 돈이 쌓인 거고 앞으로의 휴직 기간에도 또 내야 할 돈이 계속 쌓인다는 사실이었다. 아직 남은 기간이 한참인데, 안 그래도 통장에 돈도 없는데 또 매달 50만 원씩 부과된다니. 이것도 연금기여금만 해당되는 말이지 건강보험료는 아예 손도 대지 않은 상태다. 알아보려면 알아볼 수 있는데 이것도 겁이 나서 확인을 못하고 있는 지경이다. 건강보험료도 기여금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한 금액이 쌓였을 걸로 예상되기는 하는데.


이런 모든 고민을 상쇄할 단 한 가지의 방법은, 그냥 일을 하는 거다. 이제 계급사회는 아니라지만 엄연히 말해 불로소득도 없고 평범한 노동자 계층인 나는 죽으나 사나 일을 하고 노동을 해서 월급을 받아야 별 고민 없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일을 해서 월급을 받으면 연금관리공단에 낼 돈도, 건강보험관리공단에 낼 돈도 자동 공제가 되니까 별 고민할 필요가 없다. 정말 이도 저도 다 아니면 모든 걸 포기하고 퇴직하고 나와서 남편에게 의지하고 살면 된다. 건강보험도 남편 밑으로 들어가면 되고,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정말 긴 시간 동안 이 문제에 관해 고민했다. 아무리 아이가 발달문제가 있어서 내가 아이에게 어쩔 수 없이 꼭 필요한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완전히 의지하면서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말이다. 휴가도 없이 밤낮 성실히 일하는지라 외벌이로 먹고 산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둘이 벌 때보다 좀 아끼고, 사치만 부리지 않으면 그럭저럭 살만한 형편이다.


나라는 사람은 아무런 직업 없이 오로지 집에서 살림과 육아만 하며 그것에 만족하고 살 수 있는 인간일까? 직업을 포기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아이가 크면 소소한 일자리를 찾아갈 수도 있지만, 지금처럼 교육공무원으로서 지위가 보장된 위치일 가능성은 전무하다.


성인을 바라보는 고등학생 나이의 아들을 두셨는데 24시간 아들을 케어해야 해서 반강제로 일을 놓고 있는 분이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아이가 특수학교 등교를 아예 거부하는 바람에 담임선생님도 좋고 학교 시설도 여러모로 만족할만한데도 사춘기가 지나면서 증상이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져서 옆에 누가 붙어있지 않으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하는 수없이 그분이 직장을 포기하고 아이를 전담마크하는 중이다.


어느 날은 운전하다가 과속으로 벌금고지서가 날아왔는데 남편 눈치가 너무 보이더라고. 이상하게 전에 본인이 일할 때는 한 번도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는데 집에서 돈 한 푼 못 벌고 있는 상황에서 내야 할 벌금이 생기니 괜히 죄책감이 들었다고. 전에는 그런 비슷한 일이 있어도 내가 오죽 애 때문에 정신이 없었으면 그랬겠느냐고 큰소리치고 넘어갔는데 이제는 그게 잘 안된다는 그 이야기에서 많은 걸 느꼈다.


나 스스로의 경제력을 갖고 사는 게 내 생각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나이가 더 들수록, 아이가 커갈수록.


등교를 힘들어하고 약물 부작용으로 수면 장애 때문에 힘들어하는 아이를 보면 곁을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이 수시로 들면서도 나의 거취에 대한 고민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전 07화 내가 없으면 집이 안 돌아갈거란 착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