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일이 필요한 이유
복직을 한 달여 남겨두고 있다. 당장 업무에 돌입한 것도 아니고, 누가 등 떠밀면서 미리 업무 준비하라고 하는 것도 없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불안한 마음에 걱정만 하다가 돌아가실 것 같아서, 뭐라도 하나씩 해보려고 매일 발버둥을 치고 있다.
예전 업무 자료 파일들을 들춰보기도 하고, 인수인계받은 업무목록에 들어있는 파일들을 이리저리 열어보기도 한다. 수업에 쓸 자료들도 검색해 본다. 요새는 마이크로소프트 365를 쓴다기에 검색해 보고 겨우 가입하고 살펴봐도 시스템 자체가 잘 이해가 안 된다. 노션도 써보려고 시도해 봤다가 잠정 중단한 상태다. 아직 아날로그적 인간인 나는 펜과 종이를 이용해서 업무수첩에 정리하는 게 더 편한 것 같다는 씁쓸한 결론을 내렸다. 세상의 흐름에 앞서기는커녕 발맞춰 진도 따라가는 것도 벅찬데 이 상태로 복직해서 일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자꾸만 두렵다.
특히 교사 정보공유 사이트를 보다 보면 정말 놀래 자빠질 만큼 충격을 받곤 한다. 진짜 이렇게 손수 수업활동을 일일이 다 만들고 수업 준비를 한다고? 싶을 정도로 열심히 자료를 준비하고, 또 혜자 롭게도 공유까지 해주시는 분들이 많다. 보다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끝없는 자료에 놀라고, 또 요즘 수업에 많이 도입된 에듀테크를 활용한 자료들까지 접하게 된다. 일일이 에듀테크 사이트에 가입하고 도대체 어떤 사이트인지 확인해 보는 것만 해도 진이 빠진다.
자기 일에 진심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분이 많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더 겸허한 마음이 든다. 수업자료도 열심히 준비하시면서 서울대 대학원 준비까지 하고 합격한 분의 블로그를 보고는 왠지 질투심도 들고, 나는 여태 뭐 했나 왜 이것밖에 못하고 살았나 하는 자괴감도 슬며시 찾아든다.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산 건 같은데, 약간 억울함도 들고.
쓸데없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어 봤자 소용없으니 곧 마음을 고쳐먹고, 그분들 반의 반이라도 따라가 보자라는 소박한 목표를 세워본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도 겨우 따라갈까 말까일 것 같은데, 시간과 에너지를 일에 온전히 쏟을 수 없는 현실이기에 더더욱 내 목표는 현실적이어야 하고, 실천가능한 영역에 있어야만 한다. 내 주제도 모르고 이것저것 해보겠다고 덤벼들었다가는 큰코다칠 것만 같다.
그래도 이제 얼마후면 내 책임하에 업무를 해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넋 놓고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미리 업무파일을 내 식대로 만들어보고 활용할만하고 나와 맞는 자료들도 모아두어 보고, 어설프게나마 전과는 다른 양식을 사용해서 학습지 파일도 만들어본다. 염치 불고하고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요새는 왜 이런 걸 쓰는지, 뭐가 바뀐 건지, 세부계획은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아주 소소한 궁금증을 해결하고 있다.
다시 신규로 돌아간 기분이다. 아니, 신규였을 때보다 더 무능한 기분이 든다. 왜냐면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게 당연한 거였고 조금씩 배워가고 알아가는 게 임무의 전부였다고 하면, 이제는 나이도 적지 않게 많이 들었고 커리어는 오랫동안 끊겼어도 10년 가까이 이전 경력도 있으니 더 부담이 가는 것이다. '아니, 그 정도도 몰라?'라는 소리만 듣고 자꾸 헛물만 켜게 될까 봐 그게 가장 걱정이다. 도망가고 싶은 생각도 든다.
못 견디게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속앓이를 끙끙해 놓고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인지 나조차도 한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에 했던 업무 내용도 살펴보고, 새로 맡게 될 일들도 살펴보면서 생긴 큰 변화 중 하나는 아이에 대한 걱정이 확연히 줄었다는 것이다. 그전에는 하루 24시간 중 18시간 정도는 애 걱정만 하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인데, 지금은 당장 발등에 불 떨어진 것처럼 앞으로 해야 할 업무에 대한 생각이 갑자기 머릿속을 가득 채워서인지 애 걱정이 안 된다. 아이의 상태가 훨씬 좋아진 것도 아니다. 전과 다름없이 비슷한 증상은 계속되고 있고, 약물 복용도 변함없이 지속 중이다. 그런데도 왜 아이에 대한 걱정이 줄어든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전에는 내 모든 안테나가 아이를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등교시키고 나서도 하루종일 아이 걱정을 하고, 발달 관련 서적을 뒤적이고, 느린 맘 카페에 들어가 이 글 저글 살펴보는 게 일이었다. 물론 다른 일들을 하면서 주의를 뺏길 때도 있었지만, 주로 아이와 남편 생각을 하는 게 일상사였다.
신기한 것은 아직 본격적으로 출근을 다시 한 것도 아닌데도 직장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만 하는 것만으로도 내 세계에서 커다란 영역이 하나 추가된 기분이다. 그것도 정식으로 월급을 받고 내가 책임지고 해야 할 일들이 주어진다는 생각을 하니 월등하지는 못하더라도 남들보다 뒤떨어져서는 안 되겠다는,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책임의식이 발동한다.
아무것도 안 하고 멍 때릴 때에도 주로 업무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아이에 대한 걱정을 적게 하면 할수록 아이 상태가 더 나빠지는 건 아닐까? 어처구니없지만 이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내가 하루종일 격렬하고 치열하게 아이에 대해 고민한다고 해서 아이의 증상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더 나아질까? 몇 년의 경험 끝에 그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물론 아이의 행동과 마음을 옆에서 자세히 관찰하고 바라보면서 얻는 통찰도 있고, 발달과 성장에 도움이 될만한 뭔가를 끊임없이 시도해 보고 고민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다. 하지만 육아란, 특히 느린 아이 육아란 딱히 끝이 정해져 있지가 않기에 나도 모르게 지치고 번아웃이 오기도 한다.
이제는 내 머릿속 생각이 업무 생각 절반, 아이 걱정 절반 정도로 비율이 나누어졌다. 이상하게 정신적으로 도움 받기 위해서 심리 정서에 관한 책을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효과가 좋다. 나에게 새로운 세계가 하나 추가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아이에 대한 무제한의 걱정의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복직에 대한 부담감과 두려움이 커지는 만큼 아이에 대한 걱정이 줄어드는 걸 보면 이래서 여자에게 일이 필요한가,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시작할 일에 대한 고민에 휩싸일 때 부담감이 싫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는 것 같기도 하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일만이 내 삶의 탈출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