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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10시간전

네 일은 월3백의 가치가 있어

그럼 3백을 주시든가요?

복직 서류를 내고 슬슬 복직을 준비하는 나를 여전히 남편은 불만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끝까지 더 고민해 보기를 바라는 눈치다. 남편이 원하는 건 매한가지다. 휴직 연장을 하든지, 아예 퇴직을 하든지.


이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서로의 입장에 대해서 논하게 되고 결국 평행선의 논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나는 입을 다물어버린다. 네가 아직은 집에 있어야 한다, 애가 아직 저런데 꼭 일을 나가야겠느냐, 언제까지 내가 집에 있다고 애가 나아지느냐, 내 경력 무시하지 말라 등 서로의 입장에서 한 치도 양보하지 않으니 첨예한 대립만 이어진다.


사실 몇 년간 내가 휴직하고 많은 걸 포기했으니 그동안 양보한 건 내가 맞다고 생각하지만, 통상적으로 아빠보다는 엄마인 내가 휴직하고 느린 자녀를 돌보는 게 상식이라면 상식이니까 긴말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화를 내다가 나중에는 감언이설로 설득도 시도하는 남편이다. 때론 이런 말도 했다.


"네가 집에서 애보고 살림하면 내가 신경 안 쓰고 마음 편히 일할 수 있잖아. 네가 하는 일은 한 달에 3백만 원 가치는 된다고. 그걸 생각해야지."


딴에는 나를 생각해 준다고 하는 말인 것 같은데 기가 차고 코가 막힐 뿐이다.

아니, 내가 하는 일이 월 3백의 가치가 있으면 그 긴 휴직 기간 동안 생활비 제외하고 순수 한 달에 3백을 월급처럼 주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 돈을 줄 생각도 없었을 것이고, 또 그만한 돈을 내게 줄 만큼 여유 있는 것도 아니고, 설령 준다고 해도 다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3백만 원을 주지도 않으면서 나한테 내가 하는 일의 가치가 3백은 된다는 말만 하면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말하면 '아, 정말 내가 하는 일은 그만한 가치가 있구나. 비록 실제로 돈은 받지 못하지만 그 돈의 가치를 생각하면서 현실에 순응하고 열심히 애 보고 살림해야지.' 하는 생각이라도 할 줄 알았단 말인가.


생활비와 교육비에 나가는 돈을 가지고 일일이 간섭하는 성격의 남편도 아니고, 우리 가족을 위해서 쓰는 비용에는 박하게 굴지 않는 편이지만 일하지 않는 기간 동안 내 돈이 없으니 나도 모르게 자꾸 눈치를 보게 되었다. 눈치라는 게 내가 의도하고 보는 게 아니라, 정말 나도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 눈치를 보는 행동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럴 땐 굉장히 불쾌하고 고약한 감정이 찾아든다.


갑자기 남편이 약이라도 잘못 먹어서 내가 집에 있으면서 하는 일의 가치를 돈으로 보상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라도 들어 월 3백을 준다고 해도, 결코 편치 않을 것 같다. 내 통장에 돈이 들어오면 기분은 좀 남다르겠지만, 결국 그건 우리 집 경제 살림의 일부일 뿐이지 공적인 절차를 거쳐 정식으로 내가 번 돈의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의 능력주의>를 읽었다. 사회학 논문 같은 느낌이 나서 나 같은 범인이 읽기에는 어려운 내용이었다. 유독 눈에 들어오는 페이지는 있었다.


전통적으로 생산 노동은 '상품을 만들어내는 노동'으로 재생산 노동은 '노동력을 만드는 노동'으로 정의됐다. 오랫동안 생산 노동은 가치를 직접 생산하는 핵심적 노동으로 여겨졌지만 재생산 노동은 주변적인 노동으로 취급되거나 심지어 노동으로 취급되지조차 못했다.

급진 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이런 노동을 '그림자 노동'이라 불렀다.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그래서 일의 대가를 지불받지도 못하는 여성의 노동을 부불노동이라고도 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이 가사노동과 출산과 같은 특수한 노동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도 그 노동의 몫을 체계적으로 삭제해 왔고, 이는 자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공유하는 생산 중심적 시각을 전복시켰다.

<한국의 능력주의>


휴직을 하고 전업주부의 역할에 자발적으로 매몰되면서 나는 재생산 노동에 집중하게 되었던 것이다. 출산과 육아, 살림 같은 영역은 재생산 노동 혹은 그림자 노동이라고 보는 학자가 있다. 가치를 인정받지도 못하고 일에 대한 경제적 대가를 받지도 못하기에 그림자 노동이라고 칭한다.


아무리 아이를 잘 키우고, 살림을 잘하고, 남편 내조를 똑소리 나게 잘해봤자 대가가 없다. 혹 대가를 받는다고 해도 그건 주로 남편이 제공해 주는 경제적 보상의 일종일 게 뻔하다. 집에 있으면서 왜 전업주부가 우울증에 취약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처음 일 년은 여러 가지로 아이에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이 기간이 길어질수록 늪에 빠지는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자꾸만 억울해지는 것이다. 남편은 결혼을 하든 하지 않았든 간에, 아이를 낳든 낳지 않든 간에 전과 달라질게 없이 직장에 똑같이 출근하고 일을 하고 자기 경력을 쌓아간다. 그에 반해 나는 출산휴가에 휴직에 자꾸만 경력이 단절되어야만 하고 급기야 아픈 아이를 위한 시간적 경제적 희생도 모두 나의 몫이 되어야만 하는가. 그간 내가 감수해야 했던 경제적 손실은 아무리 박봉이라고 해도 계산해 보면 적지 않다.


물론 내가 집에 있으면서 아이 치료에도 매진할 수 있었고, 오롯이 아이에 집중 케어할 수 있었기에 얻은 측면도 많다. 계속 일을 했다면 절대 이만큼 신경 써주지도 못했을 것이고, 끝 간데없는 죄책감에 시달렸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직 아이의 아픔은 지속되고 있고 어느 순간 다 낫는다는 성질의 것도 아니라서 장기전으로 가야 하는데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졌다.


몇 년간 내가 할 수 있는 면에서 최선을 다했고,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해도 그건 내 한계라서 되돌아가도 더 잘 해낼 거란 보장도 없을 것이고, 이제 여한이 없다고나 할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아이에게 해준 것 같다. 물론 매우 주관적으로 나 중심적인 시각에서 말이다.


나는 이제 그림자 노동에서 벗어나고 싶다. 남을 돌보기만 하는 도구가 되고 싶지 않다. 앞으로도 희생과 헌신을 할 용의가 있고, 의무로 여기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최근에 한 것만큼은 하고 싶지가 않다. 아무리 열심히 하고 발버둥 쳐봤자 집에서 아이를 돌보면서 월 3백의 월급을 받을 수 없다는 게 내가 처한 현실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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