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피아 Mar 21. 2021

하늘 아래 같은 초록은 없다

오늘 외출을 하면서 입은 옷을 엘리베이터를 내리며 되짚어보니, 초록색 치마에 초록색 잠바이다. 웃옷을 고를 때도 초록색 스웨터를 입을까 잠깐 망설이다가 검은색 티를 선택했었다.  생각해보니, 신발을 고를 때도 초록색 단화 앞에서 잠깐 망설였던 것 같다. 하마터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초록초록 한 마리의 애벌레가 될 뻔했다.


나는 초록 마니아이다. 옷이나 신발을 고를 때, 초록이면 컴퓨터 화면에서 일단 누르고 들어가본다. 얼마나 나를 설레게 하는 초록인지가 제일 중요하고, 그다음에 디자인이나 재질을 살핀다.

디즈니 영화에서도 유난히 '메리다와 마녀의 숲'을 좋아했던 이유가 그녀가 말 위에서 화살을 쏠 때 입었던 드레스가 매우 격조 있는 초록색에 독특한 질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나에게 정말로 어울릴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이런 드레스가 시판이 되기만 하면 살 기세로 인터넷을 뒤졌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고백한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초록이 입어내기에 무난한 색은 아니다.

초록이 일부 섞여 들어간 옷은 흔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옷은 '나는 초록'이라고 자기주장 강하게 소리치고 있기 때문에 입자마자 다른 사람들 눈에 띈다. 하지만 다른 색 옷과 조화를 이루어서 입으면 참 멋있다. 오늘 했던 실수를 하지 않고 초록초록 착장만 피하면 된다.

어떤 초록인지도 중요하다. 연두색, 올리브색, 카키색, 쨍한 초록, 청록색, 쑥색, 코발트가 섞인 초록 등등. 아 요즘에 많이 볼 수 있는 '아기초록'도 있다. 나무에 이제 막 초록색 기운이 올라오는 연한 빛나는 그 색을 나는 '아기초록'이라고 부른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말랑해지는 색이다.

초록이 쨍할수록 다른 옷은 짙은 색으로 눌러준다. 검은색이나 무채색으로 입어야 쨍한 초록이 빛을 발한다.


왜 초록이 좋은지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이 오십에 아직도 나를 설레게 만드는 아이템은 그렇게 많지 않다. 무엇이 나를 설레게 만들까?

일단은 초록이 그렇고.

요즘에 입문한 오코노모야끼도 그렇다. 우연히 냉장고에 굴러다니는 양배추를 처리하고자 큰 기대하지 않고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1주일 내내 1일 1 오코노모야끼를 먹기도 했었다. 하나 크게 부쳐놓고는 다이어트 하는 양심상, 네등분해서 몇 조각은 남기리라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접시 바닥을 보게된다. 이럴거면 처음부터 나누기는 왜 나누었을까? 기름에 부친 음식이긴 하지만 양배추니까 괜찮은 거라고 자문자답한다.

이문세의 '옛사랑'도 그렇다. 그의 다른 노래도 가슴 설레게 좋지만, 노래 가사만큼이나 가슴에 사무친다. 아껴서 불러볼 옛사랑 이름도 생각이 나지 않을만큼 오래되었는데 말이다.


이제는 마음 안에서 감동을 느끼는 촉수가 무뎌져있다. 하굣길에 뛰쳐나오는 아이들을 보면 그저 웃기만 할 뿐이다. '뭐가 그리 좋을까?' 궁금할 뿐이다.

그래도 어린아이들처럼 뛰기만 해도 좋지는 않지만, 내게 아직 남아있는 설레는 것들이 있어서 다행이고 삶이 조금 더 풍요로워지는 것 같다.

초록을 입으면 내가 특별해지고, 오코노모야끼를 먹으면 나를 위하는 것 같고, 옛사랑을 들으면 내가 괜찮은 시절을 지내온 것 같다.

무엇이 또 설레려나? 앞으로 그 리스트를 하나씩 더 늘여보겠다 생각해본다.


옷을 새로 사려고 하면, 딸은 제일 먼저 체크를 한다.

'엄마, 초록색 많잖아.'

그럼, 나는 단호하게 말한다.

'이건 그거랑 다른 초록이야'

'딸아, 세상은 넓고 초록은 많으며, 하늘 아래 같은 초록은 없단다.' 진지하게 말해주려고 하는데, 벌써 딸은 가버렸다. 매일 검은색 옷만 사는 네가 뭘 알겠니.

오늘도 또 다른 초록을 사냥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말 존버가 답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