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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Mar 24. 2021

이제 우리 서로의 시간을 갖도록 해

엄마로 살아온 지 이십 년째이다.

나는 딸이기도 하고, 부인이기도 하고, 일할 때는 조직의 일원이기도 하지만, 항상 제일 먼저 생각나는 내 역할은 엄마이다. 왜일까? 아마도 다른 역할에 비해, 내가 전적으로 해야 하는 의무가 제일 막중하기 때문인 것같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엄마의 존재가 태양과도 같으니까 말이다.


이제 내 역할의 우선순위가 바뀌어야 할 때인 것 같다.

아이들은 많이 컸고, 더 이상 내가 아이들의 육체적인 생존을 도맡아 책임져야 할 시기는 지나고 있다. 정서적 지지는 아이들이 커서도 속되겠지만,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 될것 같다.


아이들이 커 가면서 문득 불안했던 적이 있다.

어렸을 때는, 내가 아이들의 모든 면을 다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언제 배고픈지, 감정은 어떤지,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을 제공하는 일이 엄마의 무였다. 그런데,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서부터 내가 모르는 영역이 생겼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내게 말해주지 않으면 나는 모르는 채 지나갈 수밖에 없는데, 내가 아이를 다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 불안했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요즘은, 그때의 걱정이 우스울 정도로, 내가 아이들에 대해서 아는 부분이 훨씬 적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겉 낳았지, 속 낳았나.' 하는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두 아이 모두 내 키를 훨씬 뛰어넘고, 내가 우리 집에서 최단신이 된지는 오래다. 딸의 운동화를 물려 신다가 이제는 그것도 너무 커버린 지 한참 전 일이다.

딸은 내 조바심 내는 태도를 싫어하고 무엇이든지 천천히 하는 걸 좋아한다. 걸음걸이, 먹는 속도도 내가 두배 정도 빠르다.

아들과 나는 지지하는 정당이 다르다. 세계관, 종교관도 다르다. 얼마 전, 오랜만에 심도 깊은 이야기를 서로 나누다가 아들이 말했다. '엄마, 우리는 서로 너무 달라'


그 말이 서운하면서 반가웠다. 뱃속에서 열 달 키워서 세상으로 내보내서 애지중지 키워놨더니 하는 소리가 그거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아들이 사춘기를 우당탕탕 통과해서 이제 어른이 되어가는 소리로 들렸다. '그동안 서로 다르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하고 서로에게 내 기준을 맞추려 했구나.' '이제 서로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고 이야기하면 되겠다' 그동안의 오해와 갈등이 해결될 실마리가 보이는 듯했다.


남들은 나와 달라도 그러려니 하지 않나. 아이들은 왜 그러면 안될까?

내가 아이들이 자라는 데에 영향을 미쳤지만, 아이들은 독립적인 존재다. 그게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마음으로는 서운할 때가 있었다.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으면서 독립하려 할 때, 부모도 사춘기를 같이 겪는다. 아이들만 사춘기를 잘 통과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에게 남겨진 숙제도 역시 만만치 않다. 아이의 독립을 인정하는 것, 아이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말이다.


아이와 거리를 두기로 했다.

이미 물리적인 거리는 떨어져 있은 지 오래다. 어릴 때 한 방에서 먹고 자고 물고 빨고 할 때에 비하면, 이제는 서로 저마다의 공간에 있고 하루 중에도 서로 부딪히는 시간도 별로 없다. 그마저도 대학교에 들어가고 독립하면 친구랑 약속하듯이 서로 스케줄 조율해서 만나야겠지. 전화해서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겠지.

정서적인 거리 두기가 더 힘들긴 하지만 해 보려고 한다. 아니, 이미 하고 있는 중이다. 남을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아, 저 사람은 나와 다르구나. 저렇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생각하는 것처럼, 아이도 어찌 보면 남 대하듯이 해야겠다 생각이 든다.


아이를 낳을 때 탯줄을 자른다. 이제 두 번째 탯줄을 내 손으로 자른다.

아이가 내 품에서 뛰쳐나가려 할 때, 서운하다 생각하지 않고 나가게 두어볼까 한다. 세상 속에 나가서 힘들 때 들어오면, 다시 품어주었다가 온기를 회복하면 이제 나가렴 문을 열어줄까 한다.

대신, 엄마는 어디 가지 않고 여기에 있는 걸로.

나는 엄마라는 역할보다 '나'라는 역할에 충실해 보는 걸로.

나와는 다른 아이들을 반갑고 기특하게 여기는 걸로.


같은 공간에서 아웅다웅 지내는 대신에, 이제 서로 각자 알아서 잘 살다가 반갑게 만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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