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1년 전쯤.
동네의 유일한 대형마트를 구경하던 아이가 수족관 코너에서 걸음을 멈췄다. 수족관이라고 해도 어항 두세 개와 곤충이나 햄스터 같이 어린아이들 입맛에 맞게 자잘하게 키울만한 것들을 판매하는 코너였다.
아이의 시선이 닿은 것은 작은 컵에 들은 선명한 진청색의 물고기였다.
뭔가를 얻어내는 것보다는 포기가 더 익숙했던 순한 아들은 평소와 달리 그 앞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내 바지춤을 잡고 흔들었다.
그 조름에 입술을 잘근 씹었다.
순간 날 고민하게 만드는 건 생명의 가치가 아니라 앞으로 늘어날 내 귀찮음에 대한 가늠이었다.
그럼에도 지갑을 연다. 혼자는 외로우니 이왕이면 두 마리.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가 구매하는 물고기는 투어이기 때문에 한 어항에 한 마리만 키워야 한다는 기본적인 상식조차 없이 나는 아이의 기분만 생각하며 쉽게 생명을 돈으로 샀다.
아이가 갖고 싶어 하던 진청색의 물고기는 다다음 날 죽었다. 한 생명의 바스러짐에 나는 조금 찜찜했고, 아이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마트에서 나오며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걸 미리 언질 받은 아이는 눈시울을 조금 적실뿐, 슬픔에 취하기보단 스스로에게 '이건 흔한 일이야. 마트에서 사 오는 물고기는 그런 일이 생기기도 하잖아.' 라며 상황을 이해시키는 데 더 집중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아이의 관심 밖이면서 내가 그저 죽은 물고기가 외롭지 않도록 숫자를 맞추기 위해 적당히 색을 맞춰 구매한 빨간 물고기뿐.
이름도, 여과기도 없이. 한 달에 한두 번 물이나 갈아주고 틈틈이 밥이나 주던 그 사랑받지 못하는 물고기는 일 년을 넘게 살았다. 아마도.
그리고 그제, 아니면 어제.
어쩌면 그보다도 전에, 빨간 물고기가 죽었다.
사소하고도 초라한 죽음 앞에 나는 무감했다. 오히려 조금은 달가웠는지도 모른다.
임신 후, 아이에게 좀 더 집중하고 싶은 마음에 좋지 않은 몸상태로 무리하고 있던 중이라 귀찮은 일이 줄었다는 생각을 안 하지는 않았다.
나는 남편에게 조용히 뒷마무리를 부탁했다.
"유노 안 볼 때, 물고기 좀 버려."
하나의 생명에게 찾아온 종말은 우리에게 그저 쓰레기 처리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물고기를 '처리'한 남편이 빈 어항은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화장실에 놓고 나온 바람에 아이의 눈에 띄고 말았다.
"엄마, 물고기 죽었어?"
나는 망설였고, 아이는 내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곤란한 마음에 시간이 길게 늘어졌다.
"어.. 미안. 유노가 속상할까 봐 말하지 못했어."
말을 이해하는 찰나가 지나고, 아이는 무너지듯 울기 시작했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프다며 제 가슴을 긁어대는 아이의 과한 감정선은 딱히 공감되지 않았는데도 내 입술도 함께 떨려왔다.
한참을 그렇게 울다, 또 한참을 물고기는 나이가 많아 죽었을 거라며,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아이는 자신을 설득하며 제 마음이 섞인 울음을 한 껏 쏟아냈다.
1년, 물고기에게는 그리 짧진 않은 것도 같은 시간을 이름조차 없이, 그저 의무감의 손길에 생존했던 물고기의 죽음이 아직 이별이 어려운 아이의 슬픔으로 조금은 의미가 있었길.
물론 그런 것이 이미 죽어버린 물고기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만은, 적어도 아무런 지식 없이 생명을 구입해 최소한의 것들만 해준 내 죄책감을 희석시킬 수 있기에.
안녕. 빨간 물고기.
2021년을 기준으로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