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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sa S Mar 07. 2024

여성의 날에 다시 보는 영화 <내가 사는 피부>

여성이란 무엇인가?

2011년에 개봉한 영화 <내가 사는 피부>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작품이다. '강제적인 성전환 수술'이라는 충격적인 설정은 정체성과 주체성에 대한 다양한 사유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영화 리뷰들을 살펴보다보면 이 영화에서 비센테를 강제로 '여성으로 만드는' 방식을 두고 감독이 여성의 고정적인 성역할을 상정하고 있다는 관객들의 비판도 적지 않다. 그러나 한편 알모도바르는 이전에 개봉한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귀향> 등을 통해 여성서사를 그리는 감독으로도 이미 유명하다. 그러한 그가 <내가 사는 피부>에서만큼은 뿌리깊은 여성혐오에 기반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혹은 비센테를 베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여성'이라는 관념이 영화에서 표면적으로 재현된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내가 사는 피부>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처음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생각했을 때엔 여성의 날에 맞추어 써야 할지,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3/31)에 맞추어 써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여성의 날을 앞두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 영화는 사실상 트랜스젠더를 다루고 있는 영화가 아니며, 또한 내가 영화를 본 뒤 가장 먼저 메모장에 적은 문장이 "여성이란 (대체) 무엇인가" 였기 때문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여성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을 때 의미한 바가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여성이라는 관념이었다면, <내가 사는 피부>의 로베르트는 성기부터 피부까지 신체를 재조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여성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러나 그가 만든 것이 정말 '여성'이었을까?


서사는 의사 로베르트와 그의 딸을 강간한 것에 대한 처벌로 '여성이 되는' 비센테(베라)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이야기의 배경에 존재하는 로베르트의 죽은 아내 갈과 딸 노르마에 대한 설정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페인어에서 '노르마Norma'는 '규범, 표준, 법규'를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강간하다'의 의미로 사용되는 동사 'violar'는 '위반하다, 어기다, 침해하다' 등의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비센테는 Norma를 violar하는 인물, 즉 (서사적으로는) 노르마라는 한 여성을 강간하는 인물이자 (상징적으로는) 규범을 위반하는 인물인 것이다. 그런데 피해 직후 정신을 잃은 노르마는 다시 깨어나서 아버지인 로베르트를 보고 절규한다. 그 뒤로 노르마는 마치 로베르트가 강간의 가해자인 양 그를 피하기 시작한다. 의사는 노르마가 "아버지를 강간범이라 여긴다"고 말한다. 이는 로베르트의 서사에 비극성을 더해주기도 하지만, 로베르트라는 인물이 상징적으로는 딸을 강간하는 인물상이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스페인의 문학과 영화의 서사 전통에서 '딸을 강간하는 아버지'는 오랫동안 권위적인 가부장제의 상징으로 쓰여 오기도 했다.


노르마 (출처: lapielquehabito.com)


로베르트는 비센테를 단계적으로 여성으로 바꾸는 수술을 진행하며 그에게 자신의 죽은 아내 갈(Gal)의 얼굴을 입힌다. 그리고 자신이 개발한 인공피부 역시 '갈'로 명명한다. 작품에서 '피부'는 로베르트가 규정하는 여성성과 가장 맞닿아 있는 요소이다. 영화 초반부에 비센테는 로베르트가 개발한 인공 피부로 온몸이 뒤덮인 직후 자신이 ‘완성’된 것이냐고 묻는다. 갈이 죽은 이유 역시도 피부와 연관된다. 갈은 교통사고로 인해 화상을 입어 피부가 망가졌고, 거울이 없는 방에서 누워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딸 노르마가 노래를 부르는 소리에 창밖을 내다보려던 중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절규한다. 갈은 노르마가 보는 앞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다. 또다시 이름으로 연결되는 상징적 층위에서, 갈은 자신이 다가가려던 규범의 앞에서 '피부' 즉 (작품 속 남성들이 규정하는) '여성성'을 잃은 것을 확인하고 목숨을 내던지는 것이다. 이때 갈의 이름 역시 특이한데, 스페인어에 원래 존재하는 이름이기는 하지만 보편적이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 그 어원은 히브리어의 '아버지', '기쁨'에서 왔으며 Abigail의 또 다른 형태라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영어의 'girl'의 슬랭인 'gal'로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베라(Vera)는 '진실, 진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갈의 얼굴을 부여받아 베라가 되어야 하는 비센테는 '진정한 여성'이 되기를 강요받는 존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성전환 수술과 피부 이식 수술을 진행하며 비센테를 감금한 로베르트는 그의 방에 화장품, 원피스 같은 것들을 들여보낸다. 마치 그것이 여성이 되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듯. 비센테는 화장품을 돌려보내고, 자신에게 주어진 옷을 찢어버린다. 그리고 남겨진 약간의 화장품과 옷들로는 벽에 그림을 그리거나 조소 작품을 창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비센테가 '만들어진 여성'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부여되는 고정적 성역할을 거부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감금의 상황을 견디기 위해 통상적으로 여성의 운동으로 여겨지는 요가 수행을 배우기도 한다. 이처럼 영화는 비센테가 여성이기에 주어지고 허용되는 것들을 때론 자신의 입맛대로 이용하기도 하며 제한된 환경에서 자신의 삶을 지켜내려 분투하는 모습을 그린다. 이는 현실의 많은 여성들이 겪는 투쟁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베라(비센테)를 지켜보는 로베르트 (출처: lapielquehabito)


비센테(혹은 베라)를 감금해두고 그의 방에 달린 카메라로 그를 관찰하며 관음적인 태도만을 보이던 로베르트가 그를 자신의 삶으로 들이는 것은 비센테가 로베르트의 이부동생 세카에게 강간당한 직후부터이다. 노르마를 강간한 가해자였던 비센테는 반대로 강간의 피해자가 된다. 그리고 로베르트는 마치 그것이 비센테(혹은 베라)의 '여성성'을 완성하기라도 한 듯 그를 자신의 아내처럼 대하기 시작한다. 그러한 로베르트의 태도에 비센테는 자신 역시 로베르트를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자유를 얻은 비센테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가게에 가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이야기가 담긴 옷을 사오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자유를 이용해 로베르트를 죽이고 집으로 돌아간다. 비센테를 '베라' 혹은 '갈'로 만들고 싶어했던 로베르트의 모든 시도는 다 무용했다는 듯이, 비센테는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때 결말은 흥미로운 아이러니를 남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비센테의 어머니를 가운데 두고, 비센테가 짝사랑하던 레즈비언 직원인 크리스티나와 비센테가 마주보고 서 있다. 비센테는 어머니에게 "저 비센테예요"라고 말한다. 비센테는 강제적으로 여성의 몸이 되었지만, 이제 여성의 몸이 된 비센테는 한편으로는 크리스티나에 대한 사랑을 실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서사적 장치는 비센테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 '남성의 몸'으로 되돌아가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남긴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그저 자신은 '비센테'라고,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해도 자신은 베라도 갈도 아닌 '비센테'일 뿐이라고 선언하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비센테와 재회한 크리스티나 (출처: lapielquehabito.com)


어쩌면 비센테는 로베르트가 부여한, 즉 권위적 남성성이 부여한 자신의 모습 속에 갇힌 채 남은 생을 살아야 한다. 감독은 비센테의 이야기가 '되돌아올 길이 없는 여정'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또한 감독은 말한다. "피부는 많은 경우에 우리의 영혼을 비추어 주지만, 피부가 영혼 자체인 것은 아닙니다. 베라[비센테]의 피부가 바뀌었을지언정,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것은 아닙니다." 이때 감독이 계속해서 비센테/베라를 여성형(ella)으로 지칭한다는 점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 영화를 통해 알모도바르가 얘기하고자 했던 것은 '강제적으로 여성이 되는 끔찍함' 따위는 아니었을 것이다. 여성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시도가 얼마나 어리석고도 파괴적인지, 또한 얼마나 무용한지. 아무리 폭력과 억압과 감금으로 여성성이라 불리우는 것들을 우리에게 덧씌우려고 할지언정 우리의 영혼은 얼마나 끈질기게 우리 자신을 지켜내는지.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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