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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레씨 Apr 12. 2023

나의 뒷동산-1

불현듯 발길이 닿는 곳.


 날이 좋길래 아침에 눈 뜨자마자 불현듯 뒷동산에 올라야겠다고 다짐한다. 내가 만만하게 부르는 그 뒷동산에도 분명 이름은 있다. 월봉산. 나름 이름 있는 산이다. 그러니까 산은 산인데 어쩐지 나는 뒷동산이라 부르는 게 더 친숙하고 정감이 간다. 그건 아마도 이 동네 주민들이 지름길로 다니기도 하고, 강아지와 산책을 하러 올 만큼 낮은 산이라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며 가며 했는지 여러 발길의 흔적이 닿은 단단한 땅의 표면이 '이곳은 안전해.'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퇴사를 하고 나서는 의도적으로 알람을 하지 않은 채 느지막이 일어난다. 현대인은 시간이 금인데, 가뜩이나 미라클 모닝까지 하며 시간을 쪼개서 쓰는 시대에 나는 그와 반대로 작은? 아니 큰 사치를 누려본다. 




눈을 뜬 시간은 11시. 누군가는 부지런히 출근할 준비를 마치고 하루치의 의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시간. 저마다의 생업에 박차를 가하는 시간이다. 반면, 이 시간 내가 사는 아파트 인근 공원엔 햇볕을 쬐러 삼삼오오 모여 있는 할머니, 공용 운동기구에서 슬렁슬렁 몸을 푸는 할아버지 몇몇 뿐이다. 가끔 나도 그 틈에 있는 듯 없는 듯 어슬렁거리며 한적한 오후 햇살을 누린다. 나 같은 젊은이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시간이다. 그럴 때마다 난 늘 초자아가 강하게 발동해 마음 한구석, 묘하게 죄책감이 번지지만 이번만큼은 애써 모른척한다. 괜찮아. 그렇다고 세상이 무너지지 않아. 




'가자. 뒷동산으로.' 




내 방 창문을 열면 보이는 뒷동산이기에 거창하게 챙길 것도 없다. 뒷동산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나선다. 간단한 외출복 차림에 늘 신고 다니는 운동화가 전부다. 있는 그대로 꾀죄죄한 나의 민낯을 품어줄 뒷동산으로 향한다. 이때만큼은 핸드폰은 나에게 성가신 물건이 되기에 챙기지 않는다.




햇볕을 쬐는 어르신들이 모여있는 작은 공원을 지나 뒷동산 초입길을 나선다. 지난가을 앙상했던 나뭇가지엔 어느새 연둣빛 여린 잎사귀가 바람에 살랑거리며 오랜만에 왔다고 속삭이는 듯하다. 언제 이렇게 무럭무럭 자라났는지. 늘 조용한 듯 변화무쌍한 자연의 속성에 감동하곤 한다. 




하늘로 향한 시선을 아래로 거두면 5평 남짓한 텃밭이 촘촘하게 구획되어 있다. 누군가의 작은 텃밭을 구경하는 것도 나에겐 호기심거리이며 행복한 상상을 가져다준다. 역시나 거기서도 내가 가장 젊은이이기에 나는 또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우리 부모님 뻘 되시는 분들의 말을 엿듣곤 한다. 그들은 서로 올해 잘 키운 작물에 대해 자랑스럽게 품평하기도 하고 자신의 농작법을 알리고 시범을 보여주며 자연스레 대화의 꽃을 피운다. 그들의 손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쉴 새 없이 흙과 작물을 살뜰히 매만진다. 그 손길과 눈빛에는 정성과 진심이 묻어난다. 그렇게 호기심 가득하고 순수한 어른의 얼굴을 지켜보면 재미없는 작물 이야기는 묘하게 빠져들 만큼 매력적인 이야기처럼 들린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진귀한 이야기처럼 솔깃해진다. 




누군가의 텃밭은 포동포동 자란 아이가 떠오를 만큼 풍요롭다. 그 텃밭을 보면 쌈채소와 흰쌀밥이라는 투박하고도 단순한 식단이 임금님 상차림이라도 되는 듯 괜히 입맛을 다시곤 한다. 그 옆집 텃밭은 튤립과 꽃잔디가 옹기종기 심어져 있다. 그 텃밭을 지나갈 땐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어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그러니까 텃밭이 꼭 수확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게 작물 틈 사이 모퉁에 피어난 꽃은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그날 하루의 아름다움을 한 아름 선물한다. 또 그 옆 옆옆에. 작은 정자와 일인용 텐트는 쉼이 필요한 누군가의 소중한 공간일 터이다. 때로 숨 한 번 제대로 고르지 못하는 날 폭 기대고 싶은 공간이겠지. 하고 상상해 본다. 밤하늘의 별까지 볼 수 있다면 잠시나마 여행자의 마음이 되기도 하겠지. 그렇게 자연 속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낸 이의 창의력에 감탄하곤 한다.




사실 나에게도 이 텃밭에 대한 기억이 있다. 약 10년 전 내가 20살쯤 되었을 무렵, 엄마는 이 작은 텃밭을 임대해 오밀조밀 여러 작물을 재배하는데 열심히였다. 엄마는 그곳에 나를 꼭 데리고 갔다. 밭일은 선선할 때 일하기 좋아 아침 일찍 일어나 가야 했다. 아침잠이 많은 나는 그게 늘 곤욕이었다. 게다가 밭에 가면 물호수가 있는 곳까지 가서 양동이에 물을 담아 몇 번을 나르고 냄새나는 거름을 흙에 섞고 뽑아도 또 자라는 억센 잡초들을 또 뽑고.. 고작 5평 남짓한 밭에서 끊임없는 노동이 계속되었다. 상추는 또 얼마나 많이 심었는지 상추가 배춧잎처럼 커지기 전에 부지런히 상추를 따야 했다. 그리고 몇 달 동안 우리 가족 밥상엔 상추가 빠짐없이 차려졌다. 상추가 자라나는 속도에 맞춰 먹어 치운다는 말이 맞겠다. 




엄마는 왜 이런 힘든 일을 벌이는지 왜 그리도 열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식물을 대하는 엄마의 호기심과 밭을 일구는 작은 행복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느 날 엄마가 단출한 거실 의자를 주어와 그 텃밭에 두었을 때조차도 그곳이 엄마의 유일한 공간이자 창조의 공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나는 밭일은 힘드니 도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시간이 저만치 흘러 이 뒷동산에 제 발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그제야 조금은 엄마의 마음을 알 것 만 같았다. 그곳은 나에게 별다른 감흥도 없는 단순한 노동 현장이었지만, 엄마에겐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장소이자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해 창조의 기쁨을 맛보았던 장소였을 것이라고. 엄마의 마음을 어렴풋이 읽을 수 있는 조금 자란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고 기댈 곳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조금 더 어른이 된다면 알지 못했던 엄마의 또 다른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날이 오겠다. 그 마음을 엄마와 재잘거리며 나눌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이따금 슬프기도 하지만, 때로 어른의 순수하고도 나약한 모든 마음을 품어주었던 뒷동산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더없이 소중하고 감사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불현듯.

마음이 이끌 때 나는 뒷동산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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