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의 배경 >
나는 대구 옆 소도시인 경산에서 태어났다. 요즘이야 IT 강국으로 발돋움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핸드폰 하나로 경산이 어디인지 검색 끝에 단 3분 만에 경산이란 곳을 알아차릴 것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어디 멀리 여행을 다닐 때 어디서 왔냐는 말에 경산이라는 말을 하면 그곳이 어디인지 갸우뚱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교육의 도시라는 작은 경산시에서 프로야구 출범 연도인 1982년 프로야구와 함께 태어났다. 그 탓인지 어릴 적부터 야구를 즐겼고, 늘 야구 데이터에 특히 관심을 가졌다. 아마 이때부터 나의 성향이 숫자놀음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을 인지한 것 같다.
부모님 두 분의 고향은 청도군이다. 지역적으로 경산 바로 아래 있는 시골이다. 넷째 누나까지는 그 청도군 중에서도 시골에 속하는 매전면 송원리(지역 사람들은 건태라 한다.)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억척스러우신 어머님이 어떻게든 본인이 배우지 못하고 잘 먹지 못한 어린 시절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 자녀들 교육에는 진심이셔서 그나마 군에서 시라고 경산으로 이사를 하셨다. 그렇게 부모님은 건태의 가옥과 전답을 정리하시고, 어린 딸 넷을 데리고 경산으로 이사와 단칸방에서 시작을 하셨다. 부모님의 아들 출산에 대한 열망의 결실은 결국 다섯째 누나 이후 나로서 끝이 났다. 그렇게 나는 다섯 손가락의 누나들의 사랑과 부모님의 찐한 사랑을 받으며 커왔다. 한국 전쟁 발발인 6.25 이전에 태어나신 부모님 밑에서 찐한 경상도 사투리와 보릿고개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며 커왔다. 그 탓에 여전히 나도 사투리가 좀 심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렇게 나는 넉넉하지 않은 유년 시절을 보냈고, 늘 동네에서 친구들과 뛰어놀면서 지냈다. 공부는 뒷전이라 초등학생으로서(입학 당시에는 국민학교였다.) 학년이 올라가며 점점 학력 수준이 뒤처짐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니 우리 부모님께 감사했던 것 중 하나는 공부하라는 소리를 잔소리처럼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모습과 태도가 추후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 원동력이 된 것 같다.
그렇게 열심히 뛰어놀면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경산의 한 공립 중학교로 배정을 받아 중학교 시절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배치고사 등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등수가 산출되던 시기라 그 등수라는 숫자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던 배치고사 등수. 이것이 내가 본격적으로 학업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중학교 시절, 영어 수학 교과목에 대한 이동수업에서 큰 좌절감을 느꼈다. 내가 모르는 내용들을 알 것이라고 넘어가는 상(上) 반에서의 수업이 나를 점점 힘들게 하였다. 알고 보니 이미 이때는 아이들이 학원의 영향력을 많이 받았고, 선생님들도 나름 그 정도는 해왔겠거니 하고 수업을 진행한 것 같다. 이러한 격차를 좁히려니 그동안 공부를 하지 않은 나로서는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때 마침 넉넉하지 않은 형편 속에서도 어머니가 동네 영수 학원을 다녀 볼 생각이 있냐는 말에 냉큼 그러겠다고 하고 학원을 다니며 많은 도움을 받은 것 같았다. 지금 회자를 해보자면, 그 당시 학원에서 나름 내가 잘한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고, 조금의 자만심으로 수업에는 소홀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소위 말하는 잘난 척을 좀 한 것 같다. 아무튼 학교가 아닌 학원에서의 생활들은 또 다른 재미있는 경험이었으며, 그때의 주변 친구들의 다양한 학업에 대한 태도를 바라보면서 나의 교직에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좋은 경험을 한 것 같다. 정말 공부를 잘하는 아이, 학원의 도움이 필요한 아이, 열심히 하지만 생각보다 학업에서 결실을 잘 맺지 못하는 아이, 부모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학원을 나와 의욕 없는 아이, 학업에 전혀 관심이 없지만 부모의 욕심으로 나와 그냥 농땡이를 부리는 아이 등등 다양한 아이들이 학원에도 공존한다는 것을... 나는 아마 돈이 아깝기도 했고, 열심히 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는 나름 괜찮은 학생이었는 것 같다.
이렇게 학원에서 촉망받는 학생으로 거듭나면서 내가 수학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학원 선생님이 발견을 해주셨고, 그 덕에 나의 진로를 중2 때부터 수학 교사라는 명확한 길로 확고히 한 것 같다. 물론 나의 학원 생활은 만 2년 만에 중3 때 관두면서 끝이 났다. 이유는 일찍부터 철이 든 건지, 나름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이 걱정이 된 건지 부모님께 내가 먼저 그만 다니겠다 하면서 끝을 냈다. 나는 이후 중학교 정규과정을 무탈히 소화를 하였고, 고등학교로의 진학 시기쯤 다양한 고등학교들에 대한 고민 끝에 경산의 한 사립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였다. 지금도 돌아보면 나의 출신 고등학교를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가 없다. 그 당시 한 학년에 2~3개 반 정도밖에 없는 작은 소규모의 학교였지만, 젊은 선생님들의 열정과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서의 학교생활은 나름 흡족했다. 간혹,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도 많았지만 같은 학교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스트레스도 해소하였고, 서로 먼 미래에 성공하여 함께 술 한잔 기울이자는 어른스러운 말도 나누었던 것 같다. 아무튼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 이후 학원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학업에 매진하고자 하는 욕심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진짜 자기 주도적인 학습을 위해 늘 계획을 세우고 고민하면서, 수학에 대한 자부심 하나는 놓지 않으면서 나의 꿈을 이어 갔고, 그 결과 경산의 한 사립대학교 수학 교육과에 진학을 하였다.
대학 생활은 말 그대로 열심히 놀았다. 조금은 소심했던 나의 성격이 어떤 계기에 의해 바뀌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짓궂고 적극적인 나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과외 아르바이트를 통해 용돈을 벌고, 그 돈으로 대학 동기, 선후배들과 한껏 자유로운 대학 생활을 만끽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 돈의 일부분은 대학 등록금으로 내면서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려고 하기도 했다. 그 당시에 짧게나마 사랑을 해보는 시간도 가졌고, 나의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벗인 둘도 없는 관포지교도 만났다. 나의 벗과 함께 새벽을 꼬박 새울 동안 소주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인생에 대해 함께 논의도 해보고 가치관에 대해서 상의도 하면서 서로를 성장시킨 시간도 가져보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시간은 나에게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친구와는 지금도 서로 의지하면서 지내고, 삶에 대해 힘들 때마다 서로 격려를 하고 있다. 아무튼 회상을 해보면 대학 생활 7년은(대학 생활 4년 + 군 생활 3년) 나름 나에게는 얻은 것도 많고, 많은 경험의 시기였고, 즐겁게 놀았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대학 졸업 이후 취업의 문턱에서 나는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대학 생활 동안 그렇게 열심히 놀았던 그 말로는 참담했다. 물론 나의 임용 시절에는 30:1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어야 했기에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낸 사람이 많았다. 결국 나는 사수(재수, 삼수, 사수...)라는 기나긴 터널의 끝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 끝에는 늘 힘들어하는 나에게 묵묵히 지켜만 봐주신 부모님의 기쁨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시간을 주기도 하였다. 합격이라는 단 두 글자가 컴퓨터 화면에 뜰 때, 늘 무뚝뚝하시던 아버지가 그렇게 환한 미소로 바라보시는 것을 처음 보았다. 이러한 임용 시절의 시기를 어떻게 이겨냈는지... 지금도 그 시기로 되돌아가라면 절대 돌아갈 것 같지 않을 만큼 육체적, 정신적, 금전적 궁핍들이 나는 너무 힘이 들었다. 하지만 그 기간 내가 딱 하나 가장 잘한 것은 우리 사 남매 아이의 엄마를 만난 것이다. 처음엔 철없이 만났을지 모르겠으나, 지금 돌이켜보면 나름 본능적으로 나의 훌륭한 아내를 알아차리고 만난 것 같다. 나의 사수 시절 우리 아내의 도움 끝에 나는 임용에 합격하였고, 사랑과 고마움이라는 감정으로 이후 아내와 평생을 약속하였다. 할 말은 많지만 이 정도의 글로 대체를 하겠다.